미국 기업에 디자인을 입히다

[HOW I GOT STARTED] Bringing Design to Corporate America

데이비드 켈리 David Kelley는 IDEO 설립 이후 수십 년간 회사들이 더 좋은 제품을 만들도록 도우며 많은 일을 수행했다.
Interview by Dinah Eng


디자인 회사 IDEO는 모를 수도 있다(아이-디-오라고 발음한다). 하지만 아마 IDEO의 작품은 접해보았을 것이다. 애플 마우스를 사용했거나(1980년 IDEO가 애플의 첫 번째 마우스를 만들었다), 프록터 앤드 갬블의 스위퍼Swiffer 로 청소를 했거나(이 히트 제품을 같이 만들었다), 최근 공항에서 입국 심사대에 서있었다면 (입국 심사 절차를 더 친근하게 만드는 프로젝트를 교통안전국과 함께 진행했다)

데이비드 켈리의 ‘유산’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1978년 팔로 알토에서 IDEO를 설립한 후 600명의 직원과 1억 3,000만 달러의 매출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그는 수익은 밝히지 않았다). IDEO는 삼성, 엘리 릴리 Eli Lilly, 뱅크 오브 아메리카 같은 기업의 제품, 서비스, 조직 개념에 인간 중심적인 접근방법을 도입했다. 올해 62세인 켈리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디자인 종신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이 ‘버라이어티 중독자(variety junkie)’는 상이군인을 위한 이상적인 집을 설계하거나, 모바일 앱에서 엘모 Elmo *역주: 만화 세서미 스트리트의 캐릭터가 아이들에게 선행을 가르치게 돕는 등 IDEO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오하이오 주의 바버턴 Barberton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굿이어 Goodyear 타이어의 정비기사였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여느 평범한 중서부 가정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대학교 진학에는 진지한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자동차나 세탁기를 분해하는 데 훨씬 흥미를 느꼈다.

1973년 카네기 멜런 Carnegie Mellon 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후 시애틀에서 보잉 747기의 인테리어를 디자인하는 일을 하게됐다. 스탠퍼드에 제품 디자인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인간중심적 기술에 관심이 생겼는데, 내가 입학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이턴 Dayton에 위치한 내셔널 캐시 레지스터 National Cash Register로 옮겨 새로운 ATM기를 디자인했다. 그러던 중 입학허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탠퍼드 입학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이를 위해 디자인하는 것을 좋아한다. 1977년 공학 및 제품디자인 석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8년 멘토인 밥 매킴 Bob Mckim 교수에게 계속 가르치는 일도 하고, 내 회사도 만들고 싶다고 상담을 청했다. 매킴 교수는 당시 스탠퍼드를 다니던 딘 허비 Dean Hovey를 소개해줬고, 우리는 허비-켈리 디자인 Hovey-Kelley Design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실리콘밸리에서 회사를 경영하던 여러 교수들이 우리에게 첫 번째 프로젝트를 맡겼다. 시각장애인에 유용한 읽기용 기기와 혈구 계측 차동장치(a differential blood cell counter)라는 의료 장비를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회사를 설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탠퍼드 동문 한 명이 우리에게 스티브 잡스를 소개해줬다. 우리는 애플과 많은 일을 하게 됐다. 애플은 기술에, 우리는 인간적인 면에 중점을 두었다. 애플 마우스를 디자인하면서 마우스를 손끝으로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비누처럼 잡고 움직일 것인지 고민했다. 우리가 애플 제품을 디자인하자 사람들은 우리가 누군지 알고 싶어했다.

당시 우리는 사무실 세 곳의 월세로 300달러를 냈다. 사무실을 10년 임대 계약할 때 주저했던 기억이 난다. 여전히 갚아야 하는 학자금이 남아 있었고 전재산보다 빚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매출 계산에 관심이 없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시급 25달러에 6명의 직원을 고용했다. 근무 시간의 반은 일했고 반은 일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 모두가 계속 바쁘게 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급을 받는지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1980년에 딘이 더 이상 컨설팅 사업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 우리는 1981년 회사 이름을 데이비드 켈리 디자인 David Kelley Designs(DKD)으로 바꿨다. 컨설팅 사업과 디자인 작업의 장점은 여러 회사와 일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디자인에만 관심이 치우쳐서 사업이 막다른 골목에 봉착할 수 있다는 점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한 예로, 처음에는 의자를 디자인할 때 나중에 어떻게 수리하거나 AS를 할지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전체 그림을 본다.

모두들 그렇듯 우리도 실패를 겪었다. 1984년 이노메 Enorme라는 회사를 설립했을 당시 판매하려던 전화기의 디자인을 맡기고자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에토레 소트사스 Ettore Sottsass를 영입했다. 투자자들로부터는 수십만 달러를 확보했다.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우리 디자인을 채택했는데, 우리는 박물관을 통해서만 전화기를 판매하는 배급업자를 골랐다. 사업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고객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가치제안(value proposition)’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전화기 재고만 남았다. 아직도 가끔 이 전화기가 이베이 eBay에 올라오는걸 보곤 한다.

DKD 시절에 운 좋게 실리콘밸리에 있는 가장 훌륭한 벤처 캐피털 회사들과 전도 유망한 기업가들과 일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자본금을 모아 초기 단계의 프로젝트를 후원하고, 투자자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아이디어를 착안했다. 이 인큐베이터를 온셋 Onset이라고 불렀다. 난 더 이상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현재도 꽤 성공을 거두고 있다.

1991년쯤 고객들이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의 통합 서비스를 요구했다. 우리는 이를 충족하기 위해 두 회사와 협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합병하는 것이 고객들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회사 이름을 짓기 위해 전사적으로 대회를 열었고, 우리 모두는 ‘아이디어’라는 단어에 꽂혔다. 접두사인 ‘아이디오’를 이용해 이름을 아이디오-스페이스 Ideo-Space로 정할지, 아니면 이데올로기와 비슷하게 들리는 다른 단어로 정할지 고민했다. 결국 IDEO로 정했다. 우리가 ‘디자인적 사고’라고 부르는 방법론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혁신을 만들어냈다. 위험을 감수한 회사들이 우리에게 기회를 줬다. 1996년 만든 허트스트림Heartstream 휴대용 제세동기는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대표적인 디자인이다. 초보 사용자들도 제세동기를 벽에서 떼내 환자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들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제품 작업보다 내가 서비스·경험·환경이라고 부르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90년대 초부터 회사들이 더 큰 혁신을 창출하려면 어떻게 조직을 바꾸고, 설계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자문을 구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를 ‘조직적 디자인(organizational design)’이라고 부른다. 현재 우리의 최대 프로젝트는 페루의 교육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 학교를 짓고, 커리큘럼을 만들고, 자금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한다. 우리가 업계에 끼친 진정한 영향은 디자인적 사고 과정이 회사 혁신을 돕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혁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객들에게 심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손을 잡아주면 기업들도 곧 스스로 혁신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나는 2000년 CEO에서 물러났다. 당시 50세였던 나는 그때가 다른 사람이 경영해야 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현재는 회장으로 재직하며 2005년 설립된 스탠퍼드의 디스쿨 d.school(하소 플래트너 디자인 연구소Hasso Plattner Institute of Design)에 집중하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IDEO와 스탠퍼드를 오간다. IDEO에서는 전반적인 전략 방향과 기업 문화를 주로 담당한다. 일 년에 다섯개의 강의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한다.

2007년 딸의 학교에 있을 때 내가 인후암에 걸렸고 생존확률은 약 40%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화학요법과 수술로 한 해를 보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 나는 개인과 조직이 잠재된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을 삶의 중심 목표로 생각하게 됐다. 디스쿨, IDEO, 현재 남동생(IDEO의 파트너인 톰 켈리 Tom Kelly)과 공동집필하고 있는 ‘창조적 자신감: 우리 내부에 있는 창조적 잠재력 발휘하기(Creative Confidence: Unleashing the Creative Potential Within Us All)’라는 저서를 통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책은 오는 10월 출간될 예정이다.

2007년 우리는 고위 경영진이 더 많은 소유권을 갖도록 회사 소유 구조를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얼마 전에 그 일을 마무리했다. 내가 무대를 꾸미고, 다른 사람들이 그 위에서 공연하게 만들 수 있어 행복하다. 세상에 한쪽 두뇌만 써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이 감정적인 면과 실용적인 면을 갖고 있다. CEO들은 창의성이 없어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모든 결정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My Advice

나의 충고 데이비드 켈리 IDEO 공동창업주 겸 회장

계획보다는 실천을 하라. 실험하고 실패해도 개의치 말고 두세 번 더 시도해봐라. 온라인으로 IDEO의 인간 중심 디자인 키트를 접할 수 있다. 누구나 이 디자인 키트를 이용해 자신의 세계에서 뭔가 해낼 수 있다.

놀면서 아이의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라. 어른들은 일을 습관적으로 한다. IDEO의 어떤 팀이 향수(鄕愁)에 관한 프로젝트를 맡으면, 그 팀은 회사 밖에 에어스트림 캠핑카를 두고 살면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자신의 적성을 찾아라. 좋아 보이는 직업을 가지고도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 부모님이 시켜서, 혹은 남들에게 괜찮게 보여서 직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매일매일 일에 만족한다. 적성을 찾을 때까지 멈추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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