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과 전설이 만나다… 최상호와 박남신의 우정 토크, 그땐 그랬지

SPECIAL ISSUE: Part2. 신구(新舊)의 만남

코리안 투어 43승과 20승을 기록한 최상호(58, 카스코) 프로와 박남신(54) 프로. 한국 남자 골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은 언제나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투어의 흥행몰이를 해왔다. 이제 전설이 된 두 명의 골퍼가 오래 전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 전설, 전설을 만나다
“동생 왔는가?”, “형님 오랜만이예요.” 분당의 한 식당에서 만난 최상호 프로와 박남신 프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반가운 인사를 나눈 이들은 서로의 근황을 주고 받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정동철 편집장(이하 정) 두 분, 오랜만에 뵙죠? 얼마 만에 만나신 거예요?

최상호 프로(이하 최) 글쎄… 시니어 투어 때나 한 번씩 보고 자주 못 만나. 서로 할 일들이 있으니까.

박남신 프로(이하 박) 우리가 처음 만난 게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뉴코리아 골프장일꺼야. 반포에 있는 연습장이었나? 얼마나 오래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충청도에서 열 살 때 경기도로 올라왔으니까 아마 그때쯤이겠지.

사실 남신이와 나는 처음에 프로골퍼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그냥 어릴 때 용돈벌이로 아르바이트하면서 자연스럽게 골프를 알게 된 거야. 그 당시에는 다 그렇게 시작했어.



→ 퍼트 도사 최상호, 아이언의 달인 박남신
한 잔, 두 잔… 술 잔을 기울이며 보내는 여름 밤은 두 전설이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두 전설이 명승부를 펼칠 때 감돌았던 긴장감은 어느덧 골프 팬들도 다시금 기다리는 옛 추억이 됐다.

(최)상호 형님이 퍼터를 참 잘하잖아. 난 옛날에 형님의 퍼터 기술을 배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참 아쉬웠어. 그런데 형님은 죽어도 안 가르쳐주는 거야.

당연히 안 가르쳐주지(웃음). 사실 안 가르쳐줬던 건 아니고, 그때는 가르쳐 달란 말도, 가르쳐 주겠다는 말도 서로 안 했지. 농담처럼 얘기를 많이 하지만, 퍼터는 타고나는 거야. 그대신 (박)남신이는 아이언샷이 좋잖아. 드라이버와 아이언이 얼마나 정확했다고. 그러니까 그린 적중률이 굉장히 좋았지. 나는 남신이에 비해 그런 건 좀 모자랐어. 그런데 결국은 퍼터야(웃음). 골프는 확률게임이라고 하잖아. 결국 1m짜리를 누가 넣느냐에 따라 우승이 결정돼.

이제 다 지나갔으니 하는 얘기인데, 옛날에 형님하고 시합을 하면 내가 항상 홀에 더 가까이 붙였었어. 그런데 홀 옆에 갖다 놓으면 뭐하냐고. 저 멀리서 한 번에 집어 넣어 버리는데… 김새는 거야. 완전히 김새는 거라
고.

누가 이런 말을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 드라이버는 쇼(Show)고, 퍼팅은 머니(Money)다. 드라이버샷이 쫘?악 날아가면 멋있잖아. 그런데 그게 다 점수는 아니야. 그린에서 깔짝깔짝하면 결정나잖아.

그건 타고나는 거야. 퍼터 감각은 완전히 타고나는 거라고.

맞아. 기본적으로 타고나야 해. 그런데 연습도 많이 했어. 지금 젊은 친구들이 연습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옛날에 우리는 하루 종일 맨바닥에서 연습했어. 매트 같은 건 없었지.

미국같이 양잔디에서 연습했으면 더 좋았겠지. 그런데 우리는 그런 여건이 안 되잖아. 흙 바닥밖에 없었어.



→ 7전8기 최상호, 10수생 박남신
골프 천재일 것만 같은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험난한 길이 있었다. 본격적인 프로선수가 되기까지 프로테스트에서 몇 번씩 낙방한 것만 봐도 두 전설도 한 인간에 불과했다.

정 그 당시에는 프로테스트 통과가 힘들었나요?

우리 때는 타수로 정했어. 타수만 되면 몇명이든 상관없었지. 그런데 90년대 와서 골프 활성화를 위해 등용문을 넓히라는 얘기들이 많았지. 그래서 전반기 20명, 후반기 20명씩 1년에 총 40명을 선발했어. 그러다가 박삼
구 전 회장이 오면서 선진 골프에 걸맞게 미국처럼 큐스쿨 제도를 시행한 거야.

난 프로되는데 오래 걸렸어. 열 번 봤으니까, 5년 걸렸을 거야. 처음 형님하고 1977년에 함께 봤었는데 한 타 차이로 떨어졌어. 그 뒤로 5년이나 지났지.

나는 일곱 번인지 여덟 번인지 그래.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잘 안나. 사람들이 우리들한테 골프 잘 하는 방법이 뭐냐고 항상 물어봐. 그런데 뭐라고 대답하겠어. 연습 많이 하는 방법밖에 없어. 몇 년 전에 미셸 위가 우리나라에 와서 성 대결을 한 적이 있는데 기자회견장에서 멀리 때리는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는 거야. 뭐라고 대답했겠어? 세게 치세요. 세게 치면 멀리 나가요. 그럼 할 말 없잖아(웃음). 방법이 없어. 잘 하려면 연습 많이 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 다시 뛰는 코리안 투어
한국 남자 골프는 호된 시련 속에 성숙 중이다. 두 노장들이 느끼는 절실함은 더욱 크다. 투어가 살아나야 노장도 기억되기 때문이다.

정 오늘 인터뷰하신다고 신경 써서 옷 입으신 것 같네요.

와이프가 밝은 게 낫다고 빨간색으로 골라줬어. 오늘은 사진 찍히는 것이 하나도 안 피곤하네. 사진 기자가 진짜 프로인가봐.

옛날에 호주로 팬텀 광고 찍으러 갔는데 매일 비가 오는 거야. 골프장에서 찍었었는데 그 와중에 비 오고 바람 불고, 춥고 소음에… 사진찍는 게 쉽지 않더라고.

팬텀 하니까 생각나는데, 정말 팬텀 대회는 다시 부활됐으면 좋겠어. 당시 팬텀이 일년에 두 번 대회를 개최했었지. 전반기 한 번, 후반기 한 번.

사실 팬텀이 우리나라 남자 골프 활성화에 기여를 꽤 했어. 상금도 5,000만원씩 두 번이었으니 1억이나 됐잖아.

그 당시 국산 골프용품은 불모지였어. 그런데 팬텀은 골프볼로 시작해서 골프웨어 등 토털브랜드로 크게 성장했었지. 내가 안타까운 건 그런 국내 기업이 끝까지 살아남지 못했다는 거야. 그런 회사가 우리나라 골프의
역사인데… 대회도 대략 십여 년 개최했을 거야. 골프계에 이바지한 바가 큰 기업이었는데 아쉬워.

지금이라도 그런 대회들이 다시 부활했으면 좋겠어. 오랫동안 남자 대회를 개최했던 곳 중의 하나인데. 아마도 동아제약과 매경오픈 다음일 거야.

사실 골프선수라는 직업이 빛 좋은 개살구같아. 겉으로 봐서는 화려하잖아. 그래도 우리 때는 좋았어. 지금처럼 경쟁이 심하지 않았거든. 지금은 정회원이 1,000명도 넘어서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 지고 있어.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도 만만치 않게 치열해. 그래도 형님은 미국도 도전했었잖아. 그런데 샷거리가 짧아서 잘 안됐었지.

나는 여러 방법으로 미국에 문을 두드렸지. 실제 미국에서 훈련도 하고 준비를 많이 했었는데 다 실패했어. 샷거리가 짧아서였지. 그 당시 내 평균 샷거리가 240?250야드 정도였는데, 미국 애들은 270?280야드씩 나갔어. 지금이야 장비가 좋아져서 나도 260?270야드는 되는 것 같아.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 선수들도 기량이 좋아졌어. 잘 먹어서 체격도 뒤지지 않고, 머리도 좋아. 지금이야 10여명이 미국에서 활동하지만 조금 지나면 20명, 아니 더 많아질 거야. 그래도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분명 있어. 왜 선진국 애들은 매니저가 있고, 멘탈트레이너며 마사지사가 있겠어? 그런 것들이 다 필요하기 때문이지.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가 코치고 매니저고 다 하잖아. 그리고 좀 한다 싶으면 혼자 하고. 그러면 체계적인 관리가 안 되는 거야. 수명이 짧아질 수밖에 없어. 골프는 개인운동이기 때문에 특히 관리를 잘해야 해.

우리나라 남자 투어도 걱정이야. 미국같이 투어 여건이 좋아질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해. 그래야 투어도 살아나고 골프도 다시 붐이 일어나겠지. 그래도 모두 노력하고 있으니 조만간 다시 좋아질 거야.

이제 머리 좋고 젊은 인재들이 좀 나서야 해. 협회도 옛날 생각은 좀 버리고 새로워져야 하고… 그래야 발전할 수 있어. 우리야 내일 모레면 60살인데 뭘 더 바라겠어. 여건이 좋아져서 후배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운동
할 수 있도록 도와야지. 이제는 회원부터 골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해.



→골프 동반자이자 경쟁자
반가워 농담을 주고 받지만, 틈만 나면 티격태격이다. 오래 전 함께한 선·후배이자 경쟁자이기에 이젠 스스럼없는 사이가 됐다. 골프란 스포츠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다.

나는 형님보다 샷거리가 더 짧아서 미국은 꿈도 못 꿨어.

왜이래 거리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나갔으면서.

아니 예전에 나하고 같이 드라이버를 쳤는데 나보다 훨씬 앞에 있는 거야. 그럼 그거 카트 도로 맞은 거였나?(웃음) 도토리묵이나 하나 먹읍시다. 도토리묵이 장에 좋아.

그럼 장에 안 좋은 술을 먹지 말아야지. 그리고 도토리묵은 막걸리 안주잖아. 소주 먹는데 왜 막걸리 안주를 시켜. 음식 시킬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맨날 이런 식이야. 장에 좋다고 일부러 주문한 건데.

그래도 우리 둘이 멋진 승부를 했나 봐. 지금 와서 원수같이 지내진 않은 것 보니까 서로 페어플레이는 한 것 같아.

이번에 동촌C에서 열린 KPGA 선수권에 나갔는데 언더파 치고 컷탈락했어. 그런데 정말 퍼터만 되면 해볼만 하더라고. 코스도 짧고 짤라 치는 홀도 많아. 우리한테 딱 맞는 코스야. 내년에도 거기서 한데…

그러면 내년에 제대로 도전 한 번 해봐. 그러면 최장수 우승 기록 깨는거야.

그러면 퍼터 좀 가르쳐줘. 동촌이면 할만해(웃음).



깊어 가는 여름 밤, 두 전설의 이야기는 한없이 이어졌고, 우리나라 골프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노장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 전설이 있기에 우리나라 골프는 언제나 희망적이다.


[Profile]

최상호
생년월일 1955년 1월4일
신체 170cm, 70kg
프로 데뷔 1977년 9월30일
주특기 퍼팅
투어 총 우승 횟수 43승

박남신
생년월일 1959년 4월14일
신체 177cm, 72kg
프로 데뷔 1982년 12월16일
주특기 아이언샷
투어 총 우승 횟수 2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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