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 전설을 만나다
“동생 왔는가?”, “형님 오랜만이예요.” 분당의 한 식당에서 만난 최상호 프로와 박남신 프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반가운 인사를 나눈 이들은 서로의 근황을 주고 받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정동철 편집장(이하 정) 두 분, 오랜만에 뵙죠? 얼마 만에 만나신 거예요?
최상호 프로(이하 최) 글쎄… 시니어 투어 때나 한 번씩 보고 자주 못 만나. 서로 할 일들이 있으니까.
박남신 프로(이하 박) 우리가 처음 만난 게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뉴코리아 골프장일꺼야. 반포에 있는 연습장이었나? 얼마나 오래됐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충청도에서 열 살 때 경기도로 올라왔으니까 아마 그때쯤이겠지.
최 사실 남신이와 나는 처음에 프로골퍼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그냥 어릴 때 용돈벌이로 아르바이트하면서 자연스럽게 골프를 알게 된 거야. 그 당시에는 다 그렇게 시작했어.
→ 퍼트 도사 최상호, 아이언의 달인 박남신
한 잔, 두 잔… 술 잔을 기울이며 보내는 여름 밤은 두 전설이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두 전설이 명승부를 펼칠 때 감돌았던 긴장감은 어느덧 골프 팬들도 다시금 기다리는 옛 추억이 됐다.
박 (최)상호 형님이 퍼터를 참 잘하잖아. 난 옛날에 형님의 퍼터 기술을 배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참 아쉬웠어. 그런데 형님은 죽어도 안 가르쳐주는 거야.
최 당연히 안 가르쳐주지(웃음). 사실 안 가르쳐줬던 건 아니고, 그때는 가르쳐 달란 말도, 가르쳐 주겠다는 말도 서로 안 했지. 농담처럼 얘기를 많이 하지만, 퍼터는 타고나는 거야. 그대신 (박)남신이는 아이언샷이 좋잖아. 드라이버와 아이언이 얼마나 정확했다고. 그러니까 그린 적중률이 굉장히 좋았지. 나는 남신이에 비해 그런 건 좀 모자랐어. 그런데 결국은 퍼터야(웃음). 골프는 확률게임이라고 하잖아. 결국 1m짜리를 누가 넣느냐에 따라 우승이 결정돼.
박 이제 다 지나갔으니 하는 얘기인데, 옛날에 형님하고 시합을 하면 내가 항상 홀에 더 가까이 붙였었어. 그런데 홀 옆에 갖다 놓으면 뭐하냐고. 저 멀리서 한 번에 집어 넣어 버리는데… 김새는 거야. 완전히 김새는 거라
고.
최 누가 이런 말을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 드라이버는 쇼(Show)고, 퍼팅은 머니(Money)다. 드라이버샷이 쫘?악 날아가면 멋있잖아. 그런데 그게 다 점수는 아니야. 그린에서 깔짝깔짝하면 결정나잖아.
박 그건 타고나는 거야. 퍼터 감각은 완전히 타고나는 거라고.
최 맞아. 기본적으로 타고나야 해. 그런데 연습도 많이 했어. 지금 젊은 친구들이 연습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옛날에 우리는 하루 종일 맨바닥에서 연습했어. 매트 같은 건 없었지.
박 미국같이 양잔디에서 연습했으면 더 좋았겠지. 그런데 우리는 그런 여건이 안 되잖아. 흙 바닥밖에 없었어.
→ 7전8기 최상호, 10수생 박남신
골프 천재일 것만 같은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험난한 길이 있었다. 본격적인 프로선수가 되기까지 프로테스트에서 몇 번씩 낙방한 것만 봐도 두 전설도 한 인간에 불과했다.
정 그 당시에는 프로테스트 통과가 힘들었나요?
최 우리 때는 타수로 정했어. 타수만 되면 몇명이든 상관없었지. 그런데 90년대 와서 골프 활성화를 위해 등용문을 넓히라는 얘기들이 많았지. 그래서 전반기 20명, 후반기 20명씩 1년에 총 40명을 선발했어. 그러다가 박삼
구 전 회장이 오면서 선진 골프에 걸맞게 미국처럼 큐스쿨 제도를 시행한 거야.
박 난 프로되는데 오래 걸렸어. 열 번 봤으니까, 5년 걸렸을 거야. 처음 형님하고 1977년에 함께 봤었는데 한 타 차이로 떨어졌어. 그 뒤로 5년이나 지났지.
최 나는 일곱 번인지 여덟 번인지 그래.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잘 안나. 사람들이 우리들한테 골프 잘 하는 방법이 뭐냐고 항상 물어봐. 그런데 뭐라고 대답하겠어. 연습 많이 하는 방법밖에 없어. 몇 년 전에 미셸 위가 우리나라에 와서 성 대결을 한 적이 있는데 기자회견장에서 멀리 때리는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는 거야. 뭐라고 대답했겠어? 세게 치세요. 세게 치면 멀리 나가요. 그럼 할 말 없잖아(웃음). 방법이 없어. 잘 하려면 연습 많이 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 다시 뛰는 코리안 투어
한국 남자 골프는 호된 시련 속에 성숙 중이다. 두 노장들이 느끼는 절실함은 더욱 크다. 투어가 살아나야 노장도 기억되기 때문이다.
정 오늘 인터뷰하신다고 신경 써서 옷 입으신 것 같네요.
최 와이프가 밝은 게 낫다고 빨간색으로 골라줬어. 오늘은 사진 찍히는 것이 하나도 안 피곤하네. 사진 기자가 진짜 프로인가봐.
박 옛날에 호주로 팬텀 광고 찍으러 갔는데 매일 비가 오는 거야. 골프장에서 찍었었는데 그 와중에 비 오고 바람 불고, 춥고 소음에… 사진찍는 게 쉽지 않더라고.
최 팬텀 하니까 생각나는데, 정말 팬텀 대회는 다시 부활됐으면 좋겠어. 당시 팬텀이 일년에 두 번 대회를 개최했었지. 전반기 한 번, 후반기 한 번.
박 사실 팬텀이 우리나라 남자 골프 활성화에 기여를 꽤 했어. 상금도 5,000만원씩 두 번이었으니 1억이나 됐잖아.
최 그 당시 국산 골프용품은 불모지였어. 그런데 팬텀은 골프볼로 시작해서 골프웨어 등 토털브랜드로 크게 성장했었지. 내가 안타까운 건 그런 국내 기업이 끝까지 살아남지 못했다는 거야. 그런 회사가 우리나라 골프의
역사인데… 대회도 대략 십여 년 개최했을 거야. 골프계에 이바지한 바가 큰 기업이었는데 아쉬워.
박 지금이라도 그런 대회들이 다시 부활했으면 좋겠어. 오랫동안 남자 대회를 개최했던 곳 중의 하나인데. 아마도 동아제약과 매경오픈 다음일 거야.
최 사실 골프선수라는 직업이 빛 좋은 개살구같아. 겉으로 봐서는 화려하잖아. 그래도 우리 때는 좋았어. 지금처럼 경쟁이 심하지 않았거든. 지금은 정회원이 1,000명도 넘어서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 지고 있어.
박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도 만만치 않게 치열해. 그래도 형님은 미국도 도전했었잖아. 그런데 샷거리가 짧아서 잘 안됐었지.
최 나는 여러 방법으로 미국에 문을 두드렸지. 실제 미국에서 훈련도 하고 준비를 많이 했었는데 다 실패했어. 샷거리가 짧아서였지. 그 당시 내 평균 샷거리가 240?250야드 정도였는데, 미국 애들은 270?280야드씩 나갔어. 지금이야 장비가 좋아져서 나도 260?270야드는 되는 것 같아.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 선수들도 기량이 좋아졌어. 잘 먹어서 체격도 뒤지지 않고, 머리도 좋아. 지금이야 10여명이 미국에서 활동하지만 조금 지나면 20명, 아니 더 많아질 거야. 그래도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분명 있어. 왜 선진국 애들은 매니저가 있고, 멘탈트레이너며 마사지사가 있겠어? 그런 것들이 다 필요하기 때문이지.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가 코치고 매니저고 다 하잖아. 그리고 좀 한다 싶으면 혼자 하고. 그러면 체계적인 관리가 안 되는 거야. 수명이 짧아질 수밖에 없어. 골프는 개인운동이기 때문에 특히 관리를 잘해야 해.
박 우리나라 남자 투어도 걱정이야. 미국같이 투어 여건이 좋아질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해. 그래야 투어도 살아나고 골프도 다시 붐이 일어나겠지. 그래도 모두 노력하고 있으니 조만간 다시 좋아질 거야.
최 이제 머리 좋고 젊은 인재들이 좀 나서야 해. 협회도 옛날 생각은 좀 버리고 새로워져야 하고… 그래야 발전할 수 있어. 우리야 내일 모레면 60살인데 뭘 더 바라겠어. 여건이 좋아져서 후배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운동
할 수 있도록 도와야지. 이제는 회원부터 골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해.
→골프 동반자이자 경쟁자
반가워 농담을 주고 받지만, 틈만 나면 티격태격이다. 오래 전 함께한 선·후배이자 경쟁자이기에 이젠 스스럼없는 사이가 됐다. 골프란 스포츠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다.
박 나는 형님보다 샷거리가 더 짧아서 미국은 꿈도 못 꿨어.
최 왜이래 거리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나갔으면서.
박 아니 예전에 나하고 같이 드라이버를 쳤는데 나보다 훨씬 앞에 있는 거야. 그럼 그거 카트 도로 맞은 거였나?(웃음) 도토리묵이나 하나 먹읍시다. 도토리묵이 장에 좋아.
최 그럼 장에 안 좋은 술을 먹지 말아야지. 그리고 도토리묵은 막걸리 안주잖아. 소주 먹는데 왜 막걸리 안주를 시켜. 음식 시킬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박 맨날 이런 식이야. 장에 좋다고 일부러 주문한 건데.
최 그래도 우리 둘이 멋진 승부를 했나 봐. 지금 와서 원수같이 지내진 않은 것 보니까 서로 페어플레이는 한 것 같아.
박 이번에 동촌C에서 열린 KPGA 선수권에 나갔는데 언더파 치고 컷탈락했어. 그런데 정말 퍼터만 되면 해볼만 하더라고. 코스도 짧고 짤라 치는 홀도 많아. 우리한테 딱 맞는 코스야. 내년에도 거기서 한데…
최 그러면 내년에 제대로 도전 한 번 해봐. 그러면 최장수 우승 기록 깨는거야.
박 그러면 퍼터 좀 가르쳐줘. 동촌이면 할만해(웃음).
깊어 가는 여름 밤, 두 전설의 이야기는 한없이 이어졌고, 우리나라 골프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노장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 전설이 있기에 우리나라 골프는 언제나 희망적이다.
[Profile]
최상호
생년월일 1955년 1월4일
신체 170cm, 70kg
프로 데뷔 1977년 9월30일
주특기 퍼팅
투어 총 우승 횟수 43승
박남신
생년월일 1959년 4월14일
신체 177cm, 72kg
프로 데뷔 1982년 12월16일
주특기 아이언샷
투어 총 우승 횟수 20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