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와 세계한상대회 발전적 결합 모색하겠다”

[Interview] 홍명기 제12차 세계한상대회 대회장
아프리카 포함 70여 개국 참가 역대 최대 규모

올해로 12회째를 맞는 세계한상대회가 오는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광주광역시 김대중 컨벤션 센터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열린다. 세계한상대회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상(한국 출신 상인)들의 교류를 위해 열리고 있다. 이번 12차 대회에서는 홍명기 듀라코트 회장이 대회장을 맡았다. 포춘코리아가 미국 LA에 거주 중인 홍명기 대회장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세계한상대회와 그의 인생역정에 대해 들어봤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Q 올 세계한상대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세계한상대회는 전 세계 한상들이 1년에 한 번 고국에 모여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사업교류를 위한 정보를 공유하는 자리입니다. 젊은 비즈니스 리더들에겐 선배들의 풍부한 경영 노하우와 사업 실무에 대한 팁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죠. 지금까지 총 11회가 열렸습니다.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3회, 제주에서 2회, 인천·대구·경기에서 각각 1회씩 열렸습니다. 1차 대회 땐 800여 명만이 참가했지만 현재는 3,000여 명 이상의 인원이 모이고 있습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성장했습니다.

올해 세계한상대회는 광주광역시에서 개최됩니다.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김대중 컨벤션 센터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올해 대회를 광주에서 개최하게 된 것은 ‘광주’라는 지역이 지닌 문화적 상징성 때문입니다. 호남권에서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이것도 의미라면 의미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광주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이 지역이 음식을 비롯해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세계한상대회를 통해 광주의 멋과 맛을 세계에 홍보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광주지역 산업체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것은 물론이고요.


이번 세계한상대회 슬로건이 ‘창조경제를 이끄는 힘, 한상네트워크’인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올해 세계한상대회는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미주 한인 이민 110주년을 맞는 해이거든요. 우리나라 이민 역사에 있어 미주 이민은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세계한상대회에 참여하는 규모도 미국 한상들이 제일 크죠. 그래서 여러모로 준비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벌써 개최지인 광주에 두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광주의 숙박시설이라든가 관련 인프라를 체크하기 위해서요. 개인적으로 이번 세계한상대회는 외형을 좀 많이 키우려고 생각 중입니다. 역대 최대 규모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번 세계한상대회 슬로건이 ‘창조경제를 이끄는 힘, 한상네트워크’인데 시의성을 고려한 선택이었습니다. 국가적 화두인 창조경제와 한상의 발전적 결합을 모색하는 자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했죠. 이번 대회가 좀 더 이슈화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이번 대회 규모는 어느 정도로 예상하십니까?
역대 최대인 70여 개국에서 참가합니다. 아무래도 미국 비중이 제일 큽니다. 매 대회 미국 비중이 50% 이상입니다. 미국 동포사회를 250만 명 규모로 생각하는데 이 중 20% 이상은 한상, 즉 경제인이죠. 한미 FTA 이후 더 증가추세에 있고요. 그 다음이 일본 한상입니다.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참여 규모도 큽니다. 그 다음이 유럽, 인도네시아 등의 순입니다.


세계에서 차지하는 경제 규모나 우리나라 교역 비중 등을 고려한다면, 이머징 국가 및 프런티어 국가 한상들의 적극적 참여 독려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지금 아프리카 시장이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상에 무역과 관련한 분들이 많다 보니 이런 게 눈에 띕니다. 이번 세계한상대회에서도 아프리카 쪽 프런티어 마켓 한상들의 참가 규모가 상당히 늘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한상들이 아프리카에 진출하려고 계획 중인데 여러모로 얻는 게 많은 대회가 될 것 같습니다.


세계한상대회에 굉장히 애착이 강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를 소개해 주시죠.
1회 대회 때부터 11회 대회까지 모든 세계한상대회에 참가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로는 2007년 부산에서 열린 제6차 세계한상대회였습니다. 부산이 일본이랑 특히 가깝다 보니 일본에서 최대 참가 규모를 꾸렸던 대회였죠. 대회 참가 인원이 4,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참석하셨었죠. 한상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는데 엄청난 힘이 됐었습니다. 대한민국과 우리 동포를 위해 우리가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대회에 박근혜 대통령 참석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하셨습니다.
나라 밖에서 지내다 보면 애국애족하려는 마음이 한층 더 깊어집니다. 한상들은 언제든지 고국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돼 있죠. 저는 대한민국이 우리 한상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 세계한상대회에 박근혜 대통령께서 꼭 참석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나아가야 할 방향, 해야할 일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시고 아울러 격려도 함께 해주신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작은 격려 한마디가 세계 한상들에겐 큰 힘이 되니까요.


우리 국민이나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번에 미래창조부 장관 내정자였다가 정치적인 잡음으로 인해 낙마한 김종훈 후보자를 보고 우리 해외 동포들은 굉장히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분의 됨됨이는 해외에 있던 저희가 더 잘 알죠. 정말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그런 인재를 버리고서 어떻게 대한민국이 창조경제와 융합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인재 등용에 있어서 좀 더 유연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해외 동포들에게 말이죠. 대한민국 내에 살고 있는 국민들도 한민족이고, 나라 밖에 살고 있는 저희도 같은 한민족입니다. 같은 민족이죠. 국내에서 한창 창조경제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창조경제라는 것도 결국엔 창조적인 인재가 핵심 아니겠습니까? 물론 국내에도 인재가 많겠지만 국외 우리 동포사회에도 인재가 아주 많습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인재들을 잘 활용한다면 세계경제대국 톱 10 진입도 머지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홍명기 대회장 누구인가

‘제12차 세계한상대회’ 대회장을 맡게 된 홍명기(80) 듀라코트 회장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다. 21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 후 곧바로 뛰어든 27년간의 직장생활에서는 보이지 않는 차별에 좌절하기도 했다. 남들은 은퇴를 준비하는 51세의 늦은 나이에 수중에 남은 돈 2만 달러로 창업을 해 연매출 2억 5,000만 달러의 듀라코트를 만들었다.

1934년 서울에서 출생한 홍 회장은 1953년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향했다. 좀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UCLA 화학과에 입학해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으나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 탓에 학창 시절은 늘 고됐다. 급기야 졸업을 앞둔 1959년 마지막 학기에는 등록금 200달러를 내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백방으로 알아봤으나 선뜻 돈을 내어주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홍 회장이 찾아간 곳은 자신을 2년 동안 가르쳤던 현지은사였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펀드를 팔아 200달러를 마련한 은사는 “이 돈으로 마지막 학기를 등록하라”며 홍 회장에게 아무 조건 없이 흔쾌히 내줬다.

어렵게 졸업했으나 사회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화학 전공을 살려 도료 제조업체 연구실에 입사했으나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경험해야 했다. 27년 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현실의 무게에 움츠러들기만 하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그의 아내였다. 홍 회장은 말한다. “제가 딱해 보였는지 어느 날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가족들은 내가 먹여 살릴 테니 이제 당신도 당신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요.”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내 사업을 시작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자금이 문제였다. 열심히 모은다고 모았지만 자식들 뒷바라지에 이것저것 쓰다 보니 집에 있는 돈을 다 긁어 모아도 2만 달러가 될까 말까였다. 거친 바다에 작은 돛단배 하나를 띄우는 격이었지만 그는 아내의 격려에 용기를 냈다. 1986년, 그는 51세의 나이에 사표를 던졌다.

그는 퇴사와 동시에 특수페인트 및 도료를 생산하는 ‘듀라코트’를 설립했다. 밤낮 없이 뛰었다. 연구만 할 줄 알았던 그가 영업도 하고 관리도 해야 했다. 실패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점점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스미토모라는 큰 거래처를 금방 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스미토모는 여러 종류의 파이프를 만드는 굴지의 철강회사다.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몸담았던 전 회사에서 홍 회장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홍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홍 회장은 말한다. “매달 한 번 꼴로 소송을 걸겠다고, 회사 문을 닫으라고 협박을 했어요. 저는 뭐 그러라고 했죠. 제가 거기에서 나오는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도 아니고 전부 다 새로 만들어 파는 건데 문제될 게 뭐냐 이런 생각이었어요.”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되기도 했다. 도료 제조에 필요한 핵심원료를 제공하던 기업이 갑자기 듀라코트에는 물건을 팔지 않겠다고 했다. 블랙마켓을 통해 같은 원료를 사려면 값이 2~3배나 뛰었다. 회사의 수익성이 급전직하했다.

하지만 홍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새 제품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런 일이 없었다면 생각도 못했을 시도였는데 상황이 닥치니 하게 된 거죠. 그렇게 해서 만든 제품을 들고 스미토모에 찾아갔어요. 내가 이러이러한 걸 만들어봤는데 한번 써보지 않겠느냐 했더니 워낙 신뢰관계가 높아서 “오케이” 써보겠다 하더라고요.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아니 도대체 이렇게 좋은 걸 왜 지금까지 숨겨놓고 있었냐고, 당장 쓸 테니 빨리 만들어 달라고 난리가 났죠.”

상상도 못했던 대박이었다. 제품을 개발한 지 6개월 만에 150만 달러어치가 팔려 나갔다. 업계에서는 듀라코트가 핵심원료 공급이 끊겨 곧 망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듀라코트는 위기를 발판 삼아 오히려 더 번창해갔다. 듀라코트는 현재 연매출 2억5,000만 달러를 올리는 미국시장점유율 1위·글로벌 빅5 특수페인트 제조업체로 성장했다.

듀라코트의 성공으로 홍 회장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최고 재력가 중한 명이 됐다.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그는 예전부터 마음먹었던 일을 시작했다. 바로 기부사업이다. 홍 회장은 2002년 1,000만 달러 사재를 출연해 ‘밝은미래재단’을 설립했다. 현재까지 여러 공익사업에 800만 달러를 집행한 상태다.

홍 회장은 말한다. “모두가 다 제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 주신은사님 덕분입니다. 그때 이후로 항상 베푸는 삶을 살아야지 생각했었는데 생활에 쫓기다 보니 그러질 못했어요. 먹고 살기에 바빴죠. 하지만 이제는 제 차례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사님이 저한테 베푸신 것과 같이 저도 남에게 베풀 때가 된 거죠.”

그는 해외 동포사회를 위해 여러 사업을 진행해왔다. 1999년 자금난으로 남가주한국학원이 폐교 위기에 처하자 당시 김영배 미국 총영사관이 찾은 것도 홍 회장이었다. 홍 회장은 기꺼이 남가주한국학원의 이사장을 맡아 6개월 만에 360만 달러를 모금, 다시 학교를 정상화시켜 동포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홍 회장은 이 밖에도 2001년 리버사이드 Riverside 시에 도산 안창호 동상을 건립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2003년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전국총회 명예회장을 맡아 행사추진을 돕는 등 여러 사업을 지원해왔다. 미주 한인사회 공익사업에서 그의 이름이 안 들어간 사업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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