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의 홍보대사

Twitter's Ambassador

케이티 스탠턴 Katie Stanton이 트위터가 상장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회고했다.
By Patricia sellers


지난 2010년 케이티 제이콥스 스탠턴이 미 국무부 힐러리 클린턴 혁신팀에 합류하고 2주 후, 규모 7의 강진이 아이티를 강타했다. 스탠턴은 당시 외교나 워싱턴 정가의 의례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야후와 구글에서 오랫동안 일해왔기 때문에 민첩한 대응과 디지털을 통해 사람들을 이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모빌 어코드 Mobile Accord라는 신생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아이티 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모금 창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백악관 담당자가 선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힐러리 국무부 장관은 결국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람들이 ‘아이티(HAITI)’라고 써서 문자를 보내면 자동으로 미 적십자에 10달러를 기부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4,000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이 모아졌다.

스탠턴이 국무부에서 일한 기간은 단 8개월에 불과했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그녀가 현재 트위터 국제시장 개발부 부사장으로서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녀의 임무는 막중하다. 잠재적 투자자들은 소셜 미디어 대기업인 트위터가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트위터의 확실한 성장 조짐을 보고 싶어한다. 이미 사용자 기반의 70%를 차지한 해외시장이 바로 성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아직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가지지 못한 대다수 신흥국 소비자들을 포함해 전 세계 소비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스탠턴은 창의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트위터를 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아이티 모금창구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녀는 외국 정부와 트위터의 관계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개방적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트위터를 마케팅하는 과정에서 문화·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녀가 정부에서 갈고 닦은 외교실력이 필요하다. 알리로가니 Ali Rowghani 트위터 최고운영책임자는 “지구상의 모든 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용자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 국가들의 실태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 트위터의 목표”라고 말했다. “스탠턴은 회사 가치를 놀라울 만큼 몸소 구현한다.”

올해 43세인 스탠턴은 2010년 8월 트위터에 합류했다. 현재는 월간이용자 수가 2억 1,800만 명이지만 당시에는 4,850만 명에 불과했다. 국제 전략도 없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본사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항공 마일리지가 엄청나게 쌓일 정도로 전 세계를 다니며 14개의 트위터 글로벌 지사를 설립했다.

그 이후에는 트위터 영업팀에서 일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거나 시위를 계획할 때, 그리고 전통적인 통신수단을 이용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트위터를 이용하는지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녀는 올 초 로가니와 트위터 CEO 딕 코스톨로 Dick Costolo한테 직함에 맞게 직접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들은 기꺼이 허락했다. 그녀는 남편 패트릭과 세 아이 엘리(13), 쌍둥이인 케일리(11)와 데클란과 함께 침실 4개짜리 프랑스의 한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트위터는 이미 세계적 현상이 됐다”고 기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여전히 프랑스에서 일하고 있다. 거기서 한 번은 엘리가 화장실에 갇혀 문을 강제로 열고 30분 만에 아이를 구한 적도 있다.

스탠턴은 한창 민감한 시기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반유대주의 메시지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을 법으로 금지하는 프랑스 정부가 사용자들의 신원을 밝힐 수 있는 정보를 넘기라고 최근 트위터에 압박을 가했다. 트위터는 몇 달간의 거부 끝에 결국 정보를 넘겨주었다. 사실 소셜 미디어상에서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 보호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는 트위터가 그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코스톨로는 트위터가 해당 국가의 법을 따를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트위터는 검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그래서 스탠턴은 어떤 국가와 파트너십을 맺어야 할지를 끊임없이 판단해야 한다. 최근 케냐에서 테러공격이 발생했을 때, 그녀의 팀은 구호기구 및 경찰들과 협력해 이들의 트위터 계정이 도용되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다. 호주에는 트위터가 공식 진출하기도 전에 트위터를 이용해 악의적인 정보를 유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스탠턴은 팀을 구성해 트위터 이용자들이 직접 악성 트위터 메시지를 신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도록 했다. 스탠턴은 자기표현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트위터를 홍보하기 위해, 미디어 기관과 정치인들이 먼저 트위터를 이용하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주요 예상 고객이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유치’하는 데는 실패했다(스탠턴은 이미 트위터가 보편화된 일본과 한국, 그리고 트위터 이용이 아예 금지된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여러 국가를 잠재 고객으로 생각하고 있다).

스탠턴은 뉴욕 피크스킬 Peekskill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부터 전 세계로 나가고 싶어했다. 브라운 대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멤피스에 있는 로즈 대학에 진학한 후, 파리와 예루살렘에서도 몇 학기를 보냈다. 스탠턴은 대학 졸업 후, 유럽과 아시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후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케냐의 비영리기구에서 일했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국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JP 모건 체이스에서 잠시 투자업무를 담당했는데, 그녀는 아주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스탠턴은 야후에서 ‘천직’을 발견했다. 그리고 회사가 18개국에서 야후 파이낸스 Yahoo Finance를 출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스탠턴은 쌍둥이 자녀들이 태어난 2002년 회사를 그만뒀고, 1년 후 구글로 이직해 당시 머리사 마이어 Marissa Mayer 밑에서 일했다. 그녀는 상품관리 및 비즈니스 개발 부서에서 6년간 일한 후, 가족과 함께 인도 방갈로르 Bangalore 로 이주해 4개월간 머무르기도 했다. 구글이 캘리포니아 주 마운틴 뷰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방갈로르에서 구글 파이낸스를 시범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야후 CEO로 옮긴 메이어가 1년 전 스탠턴에게 회사 회생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스탠턴은 그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길 꺼렸지만 “트위터에서 하고 싶은 일이 훨씬 더 많았다”고 말했다.

스탠턴의 트위터 프로필은 그녀의 유머감각과 우선순위를 잘 보여준다. 물론 140자 안에 이 모든 것을 담아냈다. ‘트위터, 세계여행자, 세 아이의 엄마, 마카롱 감정사, 유럽.’ 스탠턴의 팔로어는 6만 9,741명이다. 물론 팔로어가 10만 1,390명이나 되는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 Sheryl Sandberg나 43만 1,572명을 보유한 마이어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수많은 경영인들의 롤모델이다. 에펠탑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택 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스탠턴은 자신에게 “3가지 커리어 원칙이 있다”고 말했다.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서로 배우는 것, 없어서는 안 될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말하지 않은 커리어 원칙도 있다. 바로 일과 레저를 적절히 병행하는 것이다. 올 초 스탠턴 가족은 (현지에서 돈을 써도 되는 비자를 발급 받아) 쿠바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패트릭과 아이들이 해변에서 노는 동안에도 쿠바 활동가들이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조사하면서, 언제라도 트위터가 쿠바에 진출할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있잖은가?”라고 운을 뗀 뒤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면, 평생 하루도 일이라 느끼며 살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탠턴은 “없어서는 안 될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 그리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자신의 커리어 원칙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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