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영국 BBC에서 방영된 ‘트리피드의 날(The day of the Triffids)’은 지구 종말을 다룬 SF 미니시리즈다.
주제 자체는 흔하디흔하지만 존 윈드햄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여느 지구 종말 시나리오와는 완벽히 차별화된 스토리를 갖고 있다. 종말의 원인이 소행성 충돌이나 핵전쟁, 좀비바이러스가 아니라 식‘ 물의 습격’인 것.
‘트리피드’라는 괴기 식물은 두 가지 무기로 인류를 공격한다. 하나는 꽃잎 안의 독침으로 목표물의 눈을 공격하는데 독침에 맞은 인간은 눈이 멀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 다른 하나는 강력한 뿌리다. 문어발 같은 뿌리를 이용해 도망치는 사람을 단단히 옭아맨다.
상상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괴기식물이 실재한다면 인류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끔찍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혹여 트리피즈의 파워에 더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능력까지 겸비한다면 종말에 버금가는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다.
과연 식인식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머릿속에 떠올려봤던 질문일 것이다. 물론 식물들은 일반적으로 광합성을 통해 스스로 영양분을 생산해 낸다. 굳이 동물처럼 섭식 활동을 할 이유가 없다. 버섯을 비롯한 균류는 엽록소가 없어 광합성이 불가능한 탓에 다른 유기물에 기생하며 영양분을 얻지만 동물의 섭식과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고 했던가. 주지하다시피 식물 중에도 분명히 섭식을 하는 녀석들이 있다. 파리나 나비 등의 곤충을 먹이로 삼는 식충식물들이 그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덩치 큰 짐승과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는 식물이 자연계에 없으란 법도 없다.
목격자가 있다?!
식인식물에 대한 목격담은 역사적으로 꽤 많이 남아 있다. 그 효시는 19세기 후반 각국의 탐험가들에 의해서다. 하나 같이 구체적 사실이 결여된 일종의 ‘카더라 통신’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개중 잘 알려진 한 가지는 지난 1878년 독일의 탐험가 칼 리치가 발견했다는 식인나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칼 리치는 아프리카 동쪽 마다가스카르를 탐험하던 중 우연히 한 그루의 식인나무를 목격한다. 이 나무는 높이가 약 2.5m로 파인애플처럼 기다랗게 쳐진 잎사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 작가 쉬성화의 ‘세상에서 제일 궁금한 15가지 생물 미스터리’에 나와 있는 칼 리치의 설명은 이랬다.
“현지 주민들은 이 나무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한 원주민 여인이 부족의 규율을 어기자 사람들이 그녀를 쫓아 나무 위로 올라가도록 했고, 단단한 가시가 달린 여덟 장의 잎사귀가 그녀의 몸을 감쌌다. 며칠 후 나무의 잎이 다시 열렸을 때 그녀는 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세상이 발칵 뒤집혔지만 별다른 추가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뒤이어 아시아나 남미 대륙 원시림에서도 그와 유사한 식인식물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이 역시 흐지부지 잊혀졌다.
그러던 1970년대초 남미 과학자들로 구성된 대규모 탐험대가 식인나무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마다가스카르에서 조사를 펼쳤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탐험대는 칼 리치가 묘사한 것과 같은 식인나무를 찾지 못했지만 초대형 식충식물인 벌레잡이통풀을 처음 발견하는 소귀의 성과를 올렸다. 이 식물은 길이 30㎝, 너비 6㎝의 포충낭을 이용해 벌레는 물론 개구리와 도마뱀, 들쥐까지 잡아먹는다.
진실과 가능성의 사이
식인식물에 관한 증언 가운데 또 다른 대표적 사례로 식인 꽃 ‘포르기네이(poreugine)’가 있다. 2001년 7월 스페인의 식물학자 로이덴 러셀 박사 연구팀이 뉴기니섬의 정글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전설로만 전해져 오던 프로기네이를 발견했다는 것. 원주민 언어로 ‘사람을 잡아먹는 꽃이란 뜻의 프로기네이는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를 풍겼으며, 발견 당시 커다란 당나귀를 반쯤 삼킨 상태였다고.
러셀 박사가 가까이서 확인하니 밤송이 모양으로 갈라진 꽃봉오리 안쪽에 매달려 있던 새빨간 열매가 천천히 움직이며 당나귀의 머리와 배를 녹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몸무게가 350~400㎏에 달하는 어른 당나귀를 삼킬 정도라면 포르기네이는 충분히 사람도 소화시킬 수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 스토리는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 16세기도 아닌 2001년의 일이었지만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으며, 그 이후에 다시 발견된 적도 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구차한 설명, 즉 상상을 초월하는 악취 때문에 재빨리 현장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러셀 박사라는 사람이 식물학자라는 점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러셀 박사도, 포르기네이라는 꽃도 오직 우리나라의 인터넷상에서만 검색된다. 우리나라의 누군가가 창의력(?)을 발동해 지어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는 얘기다.
이렇듯 식인 식물은 몇몇 목격담과 증언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단순한 가능성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식인 식물에 대한 조사는 모두 무의에 그쳤고 표본, 동영상 등 학문적 공인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전무하다. 식물학자들이 식인 나무나 식인 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런 만큼 식인 식물은 최소한 현재로선 식충식물에서 파생된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이 만들어낸 피조물이라 봐야 할 것이다. 단, 식인 식물이 실재한다는 가정 하에 그 모습과 먹이 포획 방법을 과학적으로 예측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이는 식충식물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빅사이즈 식충식물
현재까지 지구상에서 발견된 모든 식충식물은 약 150종에 이른다. 이들은 먹이를 잡는 ‘덫’에 따라 포충낭, 포충엽, 선모(腺毛)형으로 구분된다. 이중 주머니 형태의 포충낭을 가진 부류는 먹이가 포충낭 깊이 들어왔을 때 뚜껑을 닫아 가둬버리거나 미끄러운 내벽을 갖고 있어서 포충낭에 빠진 곤충의 탈출을 봉쇄하는 방식으로 사냥을 한다.
포충엽을 가진 식충식물은 곤충이 잎에 올라앉으면 벌어져 있던 잎을 닫아서 포획하며, 선모형은 선모 끝부분에서 끈끈한 점액이 분비돼 곤충이 닿는 순간 꼼짝없이 달라붙어 버린다. 포충낭은 벌레잡이통풀, 포충엽은 파리지옥, 선모는 끈끈이주걱이 대표적이다.
식인 식물, 정확히 말해 식인이 가능한 식물이 어디엔가 실존한다면 이와 유사한 외관과 생장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단지 크기가 식충 식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며, 사람이나 동물의 발버둥을 견딜 수 있는 튼실함을 지녔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식인 식물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발상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마존이나 마다 가스카르에서는 신종 동·식물들이 꾸준히 발견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2012년에도 마다가스카르의 한 섬에서 성체의 크기가 3㎝에 불과한 초미니 카멜레온이 발견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바 있다.
이외에도 만화에나 나올법한 종들은 부지기수다. 비가 오면 재채기를 하는 ‘재채기 원숭이’, 밤 10시쯤 피어서 아침에 지는 ‘밤에 피는 난초’, 만화영화 ‘스폰지밥’의 주인공을 빼닮은 ‘스폰지밥 버섯’ 등도 최근 몇 년 사이 발견됐다. 세상은 우리의 과학적 지식과 합리적 사고를 뛰어넘는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학자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인간은 여전히 지구와 지구를 살아가는 생명체들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