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병석에 누워 있다. 그룹 총수가 부재한 상황. 삼성그룹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어떤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차병선 기자 @ach@hmgp.co.kr
이건희 회장이 쓰러졌다. 5월 10일 밤 갑작스런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 심근경색이었다. 이 회장은 급히 가까운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다. 주치 병원인 삼성서울병원까지 갈 시간 여유가 없었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했다. 그리고 심폐소생술을 받은 후 곧바로 삼성병원으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스텐트 시술을 받았다. 병원 측은 수술이 아닌 시술임을 강조했다. 병세가 심각하지 않다는 점도 밝혔다. 안정된 상태로 회복 중이라며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아니 안심시키길 원했다. 그렇지만 불안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치료 기간이 하루하루 길어질수록, 세간에 잡음이 새어 나왔다. 언론은 ‘만약’을 대비한 시나리오를 쓰면서 후계 구도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사망설까지 나돌았다. 16일 증권가 찌라시에서 이건희 회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언론에선 이를 인터넷 뉴스로 옮겼다. 이 회장이 쓰러진 지 6일 만이었다. 최악의 소문이 흘러나오기까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은 셈이었다.
이 같은 염려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삼성이 가진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매출 규모만 GDP의 약 20%에 이른다. 누구에게든 직간접적인 여파가 미치지 않을 수 없다. 투자자, 삼성임직원, 소비자, 국민 모두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이건희 회장이다.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주역으로 칭송받는 인물이 아닌가. 삼성 측은 사망설에 적극 대응했다. 사실무근이며, 안정적으로 회복 중이라고 거듭 밝혔다. 그렇다면 이제 불안감은 해소된 것일까?
확실한 건 한 가지다. 당분간 삼성그룹은 이 회장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회장이 삼성의 기대대로 단기간에 건강을 회복하고 경영 일선에 복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일부 우려대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이 회장의 공백기는 존재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불안을 지우기 어렵다. 그래서 삼성그룹은 이에 대처해야 한다.
회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룹 경영진이 택할 수 있는 방안은 둘 중 하나다. 이전처럼 정상적으로 운영을 하든지, 아니면 비상 체제를 꾸리든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구속되었을 때 SK그룹은 수펙스 체제로 그룹 운영 형태를 조정했다. 하지만 지금 삼성은 정상 운영을 택하고 있다. 삼성 미래전략실 이준 커뮤니케이션팀장(전무)은 12일 브리핑에서 “별도의 경영대책은 마련하지 않고 있다”며 “평소 해오던 대로 경영에 임하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삼성은 회장이 ‘단기간’ 부재하더라도, 경영차질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과 인력을 갖추고 있다.
삼성은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다. 회장, 미래전략실, 계열사 CEO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회장이 선장이라면, 미래전략실은 조타수, 계열사 CEO는 항해사 역할을 맡고 있다. 그룹 내부에선 이를 ‘삼각편대’라고 부른다. ‘관리의 삼성’, ‘조직의 삼성’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이 회장은 대규모 투자나 굵직한 사안에 대해서만 판단했을 뿐 일상적인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미 삼성그룹은 이 회장이 2008년 퇴진했을 때에도 위기를 잘 견뎌내며 안정성을 증명한 바 있다. 더구나 지금은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선장’의 역할을 상당 부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입지가 확고해졌다. 이 부회장은 이미 2012년부터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등과 함께 그룹 경영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삼성 경영진이 당면한 과제는 ‘마하 경영’이다. 최근 이 회장은 사업개편과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마하경영이란, 항공기가 음속보다 빨리 비행하기 위해선 기본 설계는 물론, 모든 부품을 바꿔야 하는 것처럼 삼성 역시 체질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회장의 뜻에 따라 삼성은 유사 업종의 계열사를 합치거나 수직 계열화하고, 계열사 간 복잡하게 얽힌 순환출자구조를 해소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9월 시스템 통합업체인 삼성SDS와 네트워크 솔루션 업체인 삼성SNS를 합병한 바 있다. 12월에는 삼성물산이 삼성SDI로부터 삼성엔지니어링 지분을 매입했다. 삼성물산과 삼성엔지니어링은 모두 건설 관련 기업이다. 올 3월에는 2차 전지에 주력하는 삼성 SDI가 소재기업인 제일모직을, 4월에는 삼성종합화학이 삼성석유화학을 흡수합병했다.
삼성그룹은 이와 함께 지분구조를 단순화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삼성 계열사가 보유하고 있던 삼성생명 지분을 모두 처분했고, 삼성카드 지분도 삼성생명에게 몰아주었다. 삼성생명은 삼성자산운용 지분을 100% 확보해 자회사로 편입시켰고, 삼성증권도 삼성선물 지분을 100% 인수해 자회사로 만들었다. 유사 계열사 합병과 지분구조 단순화를 통해 삼성그룹은 크게 전자·금융 계열과 건설·중화학 계열, 패션·미디어 계열 등 세 가지로 분화하고 있다.
남은 퍼즐은 건설 부문이다. 삼성물산과 삼성에버랜드, 삼성중공업, 삼성엔지니어링 등에 산재한 건설부분의 사업 조정이 남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남은 사업 조정이 지연될 수도 있다. 회장이 직접 챙기던 사업인 만큼, 회장이 복귀하기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가속도를 낼 수도 있다. 또 그럴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점쳐진다. 최근의 변화가 단순히 미래 경쟁력을 갖추자는 차원 외에도 승계를 감안한 포석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재계는 이재용 부회장이 전자·금융 계열을,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건설·중화학 계열을,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사장이 패션·미디어 계열을 이끌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개편으로 훗날 같은 산업 분야에서 형제자매 간 ‘한 뿌리 경쟁’을 할 가능성은 상당히 방지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관측일 뿐이다. 삼성그룹은 후계구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건희 회장이 승계를 하던 상황과 사뭇 다르다. 창업주인 고 이병철 선대 회장은 타계하기 10년 전인 1977년 이 회장을 후계자로 공식 지명했다. 선대 회장은 경영 노하우뿐만 아니라 총수의 권위까지 물려주고자 했다.
후계구도를 공식화하지 않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우선은 그럴 필요가 선대에 비해 적었기 때문이다. 선대 회장 시절에는 장남(이맹희)과 차남(이창희)이 승계에서 배제돼 경영권 분쟁 위험이 컸다.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에겐 선대 회장의 전폭적이면서도 가시적인 지지가 꼭 필요했다. 그렇지만 현재 이 회장 슬하에는 외아들과 두 딸뿐이다. 경영권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
후계구도를 공식화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삼성그룹이 처한 상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성그룹은 선대 회장 때에 비해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다. 이 회장 취임 이후 27년간 그룹 매출은 40배, 자산은 50배 이상 늘었다. 경쟁은 거세져 조금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초경쟁 시대를 맞딱뜨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후계를 언급하는 건 그 자체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이건희’가 곧 ‘삼성’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후계자를 논하는 건 삼성의 브랜드 가치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후계구도가 좀 더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 복귀가 어렵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복귀하더라도 이 회장 스스로가 본인의 나이와 건강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공식화되진 않았지만, 재계에선 이재용 부회장을 이 회장의 후계자로 보고 있다. 삼성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18년 전 에버랜드 전환사채가 이 부회장에게 발행됐을 때 승계가 사실상 결정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때 되돌리기 힘들 만큼 못이 단단히 박혔다는 것이다.
현재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는 개략적으로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각종 계열사로 이어진다. 이 부회장은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에버랜드의 최대주주(25.1%)다.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이 각각 에버랜드 주식의 8.4%씩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보다 안정적인 승계를 위해 몇 가지 과제를 풀어야 한다. 먼저 내부적으로 이 부회장 체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이 부회장을 적극 보좌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최근 사업구조 개편 역시 이를 감안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부회장 승계가 유력한 전자 부문이 수직계열화의 외형을 갖췄다. 제일모직의 주력사업이던 소재가 삼성SDI에 흡수되면서 삼성SDI(소재 및 부품)-삼성전기(부품)-삼성전자(완제품)로 이어지는 전자 부문 사업구조가 완성됐다.
최근 미래전략실 인사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고 있다. 4월 말 미래전략실에서 근무한 팀장들 대부분이 삼성전자 등으로 이동했다. 그중에는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장(사장)과 김상균 삼성전자 법무팀장(사장) 등 이 부회장의 측근으로 꼽히는 인사들이 포함됐다. 이들이 배치됨으로써 삼성전자에 이 부회장의 친정체제가 더욱 강화됐다. 조직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인력은 이 부회장을 정점으로 ‘헤쳐 모여’를 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다음 과제는 막대한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건희 회장이 보유한 주식은 삼성생명(20.8%), 삼성전자(3.4%), 삼성물산(1.4%) 등으로, 이를 상속할 경우 상속세가 5조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이들 지분이 상속되지 않고 시장에 나가면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약해진다. 이 부분에 대해선 삼성SDS가 지렛대로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은 5월 8일 삼성SDS를 연내에 상장할 것이라 밝혔다. 삼성SDS가 상장되면 18% 지분을 갖고 있는 이 부회장 삼남매가 2조 원에 가까운 상장차익을 얻게 된다.
이 회장이 갑작스럽게 쓰러지면서 상황은 조금 더 급박해지고 있다. 주식시장에서 주요 투자자들이 삼성의 주요 계열사 주가 상승에 베팅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16일 현재 종가(142만 8,000원)가 이 회장이 쓰러지기 직전 거래일인 9일 종가(133만 5,000원)에 비해 6.97% 오를 정도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삼성생명과 삼성물산 주가도 각 10.1%와 8.27%씩 상승했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외국인 매수세가 두드러져 12일부터 16일까지 5일간 3,113억 원 어치의 순매수가 이뤄졌다.
외국인은 이 회장 건강상태가 삼성그룹 경영에 치명적인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 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수혜를 기대하고 있다. 김후정 동양증권 연구원은 “삼성그룹 계열사의 지배구조 변화와 사업구조 개편이 새로운 모멘텀으로 작용하며 삼성그룹 계열사에 대한 외국인들의 매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상속 과정에서 주가가 오를 것을 예견하는 시나리오도 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급히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삼성 계열사 주식을 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더욱 낮출 수 있다. 이 같은 배경 아래 김용우 HMC증권 연구원은 “승계를 마친 뒤, 오너 일가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계열사들이 막대한 규모의 자사주 매입에 나설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다만 지금 같은 시점에서 삼성전자가 자사주 매입에 나설 가능성은 작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삼성전자가 자사주 매입에 나설 경우, 삼성전자 지분을 3.6% 가진 이건희 회장의 자산가치가 증가하게 돼 이재용 부회장의 상속세 부담을 최대 50%까지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승계를 위한 마지막 과제는 주주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시장에는 이 부회장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공존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6일 인터넷 판에서 이와 관련한 기사를 내고, 이 부회장에 대한 평판을 전했다. FT에 따르면, 삼성과 가까운 인사들은 이 부회장이 지난 23년 동안 전략기획 업무를 경험하고 필수적인 거래관계를 다뤄온 경험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부정적인 의견도 존재한다. FT는 BNP파리바 은행의 피터 유 애널리스트의 입을 빌려 “이 회장은 오늘날의 삼성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투자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부회장에 대한 지지가 자동으로 형성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포스트 이건희 시대. 아직 이 회장이 버젓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꺼내기 어려운 주제일 수 있다. 삼성 내부에선 ‘불경’한 주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미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