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까지 착한 팔방미인 브랜드 가성비 앞세워 화려하게 비상한다

시계 브랜드 이야기 ⑬ 보메 메르시에

보메 메르시에는 역사와 품질, 디자인이라는 명품 시계 3대 요소에 합리적인 가격 조건까지 갖춘 팔방미인 시계 브랜드다. 1988년 리치몬트그룹에 편입된 보메 메르시에는 2009년 알랭 짐머만 CEO의 브랜드 정비 및 재건 과정을 거쳐 다시 한번 화려한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최근 유행하는 말 중에 ‘가성비’라는 것이 있다. ‘가격 대비 성능’의 준말인 가성비는 스마트 컨슈머가 상품을 고를 때 가장 눈여겨보는 핵심 조건이기도 하다. 뛰어난 성능에 착한 가격 조건까지 갖춘, 다시 말해 가성비가 뛰어난 상품을 구하는 건 경기가 골디락스 상황을 맞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가성비 문제를 명품 시장에 적용하는 일은 일견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명품을 소유한다는 건 그 명품에 대한 고유 가치를 소유하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귀한 가치를 소유하려는 사람이 그 가치에 세속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대문시장에서 가격 흥정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명품 매장에서는 가격을 묻는 일조차 조심스럽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명품 브랜드 가격에는 거품이 끼기 십상이다. 왜 이 가격이 책정되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시계는 명품 소비재 중에서도 특히 고가에 거래되는 상품이기 때문에 가격 거품 현상이 더욱 심하다. 특정 브랜드는 상품 전체의 가격이 5년 만에 두 배로 뛴 경우도 있었다. ‘샤테크(샤넬+재테크의 합성어)가 하수들의 재테크라면 시테크(시계+재테크의 합성어)는 고수들의 재테크’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최근 젊은 남성 층에 기계식 시계 열풍이 불면서 명품 시계 시장에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아무리 출혈을 감수한다고 해도 젊은 남성이 명품 시계를 소유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이들의 선택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명품 시계 시장에서도 가성비가 화두로 떠오르게된 배경이다.

명품 시계의 가성비 조건

상품 특성상 명품 시계는 일반 상품보다 가성비 조건이 더 까다롭다. ‘가성비가 좋은 명품 시계’란 ‘뛰어난 품질(성능)과 찬란한 역사, 탁월한 디자인이라는 명품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대를 가진 시계’를 말한다. 보메 메르시에는 명품 시계 시장에서 가성비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브랜드다. 보메 메르시에는 184년에 이르는 역사와 최근 들어 더욱 향상된 기술력과 품질, 럭셔리하면서도 정갈한 디자인 등 명품 시계의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 조건까지 갖추고 있다. 보메 메르시에의 시계들은 대중적인 모델의 경우 300만 원에서 600만 원대 사이이고, 컴플리케이션 워치나 특수 소재 시계들도 2,000만 원대를 넘지 않는다. 유일하게 Clifton 컬렉션의 투르비용 모델만 6,000만 원대이나 이도 다른 브랜드의 투르비용 모델과 비교하면 저렴한 축에 속한다.

가성비로 유명한 다른 시계 브랜드들과 비교해 보메 메르시에의 가장 큰 장점은 명품 시계의 요소를 고루 잘 갖췄다는 점이다. 보메 메르시에는 종종 올라운드 플레이어에 비유되곤 한다. 가성비를 자랑하는 다른 브랜드들이 특정 성능이나 디자인 등 어느 한 부분만 특출하고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데 비해 보메 메르시에는 모든 부문에서 평균 이상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184년에 이르는 찬란한 브랜드 역사는 경쟁 브랜드들이 따라올 수 없는 보메메르시에만의 최대 강점이다. 스위스 시계브랜드들 중에서도 7번째로 오래된 역사인데다가 그 면면 또한 하이엔드급 이상의 찬란함을 자랑한다.

보메 가족회사의 설립과 성장

보메 메르시에의 역사는 1830년 루이-빅터 보메 Louis-Victor Baume와 셀레스탱 보메 Celestin Baume 형제가 스위스 유라 Jura 지방의 레브와 Les Bois 지역에 프레르 보메 컴퍼니 Freres Baume Company 시계 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된다. 프레르는 프랑스어로 ‘같은 집단에 속한 구성원’을 뜻한다. 프레르 보메 컴퍼니라는 회사 이름은 보메 집안 가족회사 정도로 보면 된다.

‘완벽한 시계만을 만들겠다’는 셀레스탱의 고집과 루이-빅터의 타고난 혜안 덕분에 프레르 보메 컴퍼니는 순식간에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1840년대 말쯤엔 스위스가 좁게 느껴질 정도로 회사의 규모가 커졌는데, 이때 루이-빅터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여성들의 시계 소비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과 영국의 식민지 사업 정책 변화가 시계 수출입사업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루이-빅터의 강력한 의지로 프레르 보메컴퍼니는 창립 21년 만인 1851년 마침내 영국 런던에 해외 1호 지점을 내게 된다. 런던 지점은 다분히 전략적 성격이 강했다. 프레르보메 컴퍼니는 런던 지점을 매뉴팩처가 아닌 수출 전략 기지로 사용했다. 또 프레르라는 프랑스어 발음이 영어권 사람들이 발음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회사 이름도 영어식인 보메 브라더스 Baume Brothers로 변경했다.

보메 브라더스는 활동 영역을 영국과 영국 식민지 전체로 넓혔는데, 이는 곧 세계 전체를 무대로 사업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시의 영국은 세계의 패권을 한 손에 거머쥔 대영제국 시절로 식민지 영토가 워낙 광대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다. 보메 브라더스는 바로 그 대영제국의 번영과 함께 세계로 뻗어 나갔다.

기술적 황금기 구가한 1800년대 후반

보메 브라더스는 순조로운 해외사업 확장과 동시에 여성들을 위한 시계 제작에도 착수해 1869년에는 여성들만을 위한 회중시계를 출시했다. 이 회중시계는 기술적인 면에서는 다른 회중시계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꽃과 식물을 새기는 등 여성스러운 이미지의 사용으로 디자인의 차별화를 꾀했다.

당시의 회중시계 디자인들은 대나무나 황제 등 중국을 상징하는 이미지(중국 수출 목적)와 말이나 기사 같은 남성성을 표현하는 이미지, 또 아예 이미지가 없이 매끈한 케이스만 있는 경우 등 세 가지로만 나뉘어 있었다. 보메 브라더스는 거기에 여성적인 이미지를 추가해 여성시계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시계 무역 사업과 여성 회중시계의 히트로 보메 브라더스는 1800년대 후반 글로벌 시계 브랜드로 급성장했다. 보메 브라더스는 외형적 성장 못지 않게 기술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뤄 캘린더, 미닛 리피터, 투르비용, 크로노그래프 기술 부문에서 당대 최고의 브랜드로 평가를 받았다. 보메 브라더스는 1860년부터 1900년까지 열린 전 세계 시계 경연 대회에서 열번의 그랑프리와 일곱 번의 금메달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특히 당대 가장 중요한 시계 기술로 여겨졌던 크로노미터 분야에서 보메 브라더스는 경쟁 브랜드들을 압도했다. 보메 브라더스는 1892년 세계 최고 권위의 시간 측정 전문기관인 큐 천문대(Kew Observatory) 주최 크로노미터 경연에서 100점 만점에 91.9점을 획득해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91.9점이란 점수는 큐 천문대 크로노미터 경연 역사상 최고 점수로, 이후 10년 동안이나 깨지지 않았던 대기록이었다.

‘보메 메르시에’ 탄생과 적통성

1909년에는 루이-빅터 보메의 손자 윌리엄 보메 William Baume가 회사에 합류하면서 보메 브라더스는 3세 경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윌리엄 보메는 1910년 보메 브라더스 본사인 스위스 레브와의 경영을 맡게 됐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25세였다.

당시 보메 브라더스는 본사인 레브와보다 런던 지점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레브와 본사와 런던 지점 간 마찰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져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윌리엄 보메는 본사의 권위를 회복하고 싶었지만, 런던 지점장이 삼촌인 아서 보메 Arthur Baume였던 까닭에 주도권 회복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윌리엄 보메는 33살이 되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레브와를 떠나 제네바로 향했다.

윌리엄 보메는 제네바에서 시계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제네바로 이주한 해인 1918년 스위스 시계 마케팅 업계의 거물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폴 메르시에 Paul Mercier를 만나 둘의 성을 딴 보메 메르시에 Baume & Mercier를 창업했다.

윌리엄 보메는 보메 브라더스 매뉴팩처를 담당한 최고 워치메이커였기에 보메 메르시에는 보메 브라더스의 기술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게다가 폴 메르시에의 사업 수완이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팔 정도로 뛰어나 보메 메르시에는 설립과 동시에 폭풍성장을 할 수 있었다. 설립 만 1년이 채 안 된 1919년에는 제네바의 켄톤공화국이 당대 최고의 워치메이커들에게만 수여하던 업계 최고의 영예 ‘제네바 홀마크 인증’까지 받으면서 업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는 사실상 보메 메르시에가 ‘보메’ 가문의 이름을 계승할 수 있는 유일한 브랜드임을 공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보메의 시계 제작 능력과 폴 메르시에의 사업가적 통찰력은 보메 메르시에를 다시 한번 스위스 대표 시계 브랜드로 만들었다. 보메 메르시에는 윌리엄 보메와 폴 메르시에의 상호보완적인 재능 덕분에 1920년 후반부터 시작된 세계경제대공황도 비교적 순탄하게 잘 넘어갔다. 오히려 이때가 기업 경영 측면에서는 보메 메르시에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1935년 50살이 된 윌리엄 보메는 건강상의 이유로 업계 은퇴를 선언한다. 윌리엄 보메가 떠나자 폴 메르시에도 2년 후인 1937년 자기 지분을 정리하고 은퇴 과정을 밟는다. 윌리엄 보메의 아들은 시계 산업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후 보메 메르시에는 제3의 인물인 이탈리아계 주얼리 사업가 에르네스토 폰티 Ernesto Ponti에게 매각된다.

보메 메르시에의 현재와 미래

폰티 가문은 1988년까지 51년 동안 보메 메르시에를 운영하다 1988년 리치몬트그룹에 브랜드를 매각했다. 리치몬트그룹은 스와치그룹과 함께 세계 시계산업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하는 거대 기업으로 산하에 보메 메르시에 포함한 13개 고급 시계 브랜드를 두고 있다. 이 그룹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보메 메르시에의 브랜드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리치몬트그룹은 오랜 시간에 걸쳐 보메 메르시에 매뉴팩처를 정비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해 경영 효율화를 꾀했다. 현재 보메 메르시에의 CEO인 알랭 짐머만 Alain Zimmermann은 이미 리치몬트그룹 산하 다른 시계 업체들을 성공으로 이끈 바 있는 노련한 시계 브랜드 전문가다. 그는 2009년 보메 메르시에 CEO로 임명됐다.

알랭 짐머만은 보메 메르시에 CEO로 선임됨과 동시에 ‘Life is about moments’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브랜드 전체를 재정비해 나갔다. 2012년엔 Hampton 컬렉션을 리뉴얼했고, 2013년엔 Clifton 컬렉션을 론칭하며 다소 모호했던 컬렉션 라인업을 5개로 정리했다. 특히 2013년 론칭한 Clifton 컬렉션에는 투르비용 라인업을 추가해 기술 수준도 한층 끌어올렸다.

라인업이 풍성해지자 디자인 수준이 향상됐고, 디자인과 기술 수준이 높아지자 세계 시계 컬렉터들의 관심도 다시 돌아왔다. 보메 메르시에는 다른 브랜드들과 달리 브랜드 정비 과정에서 가격 조정을 하지 않아 합리적인 가격대라는 장점까지 갖추게 됐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보메 메르시에가 미래 가격 상승률이 가장 높은 브랜드가 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의 정비를 끝내고 화려하게 돌아온 보메 메르시에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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