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가루를 통해 다른 꽃들로 전염되는 몇몇 기생균류의 존재는 식물학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를 식물의 성병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동물의 성병과 마찬가지로 식물의 성병 역시 숙주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물론 동물과 식물의 성병은 개념상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식물의 성병은 직접적·물리적 접촉을 통해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꽃가루처럼 균류의 포자가 강한 바람에 날리거나 곤충의 몸에 붙어 다른 식물로 이동함으로써 전염된다.
지금껏 가장 자세히 연구된 식물 성병의 원인균은 ‘마이크로보트리움 비올라세움’이다. 이 균은 꽃을 피우는 석죽과(科) 식물에 감염되는데, 일단 감염되면 수꽃이든 암꽃이든 M.비올라세움의 포자를 키우는 인큐베이터로 전락해버린다. 그리고 호박벌 등의 곤충을 매개체 삼아 다른 식물에 전염된다.
특히 이 균은 전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식물이 더 많은 꽃을 피우도록 만드는 병을 촉발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외에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아네르스 웬스트롬 박사와 라즈 에릭슨 박사가 또 다른 식물 전염성 균류를 연구한 바 있다. 그중 어떤 균은 꽃에서 토양으로 이동한 뒤 다음해에 자라나는 식물을 감염시켰고, 다른 식물의 꽃이 아니라 씨앗·잎사귀·줄기를 감염시키는 균도 있었다.
다만 학문적 관점에서 생식기가 없는 식물들 사이의 균류 감염을 성병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식물의 균류 전염을 ‘생식 질환(reproductive disease)’이라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기도 하다.
마이크로보트리움 비올라세움 Microbotryum violac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