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은 아닌데도 듣기 싫은 말

[FORTUNE'S EXPERT] 송길영의 ‘마케팅 이야기’

청자는 종종 화자의 말을 의도와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같은 엇갈림은 원래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을 괴롭히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처지를 바꿔, 나만이 우위라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난 1월 한 신문에 ‘멍텅구리 통장’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은행이 보안을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인터넷뱅킹이나 모바일뱅킹이 불가능한 상품입니다. 다시 말해 창구나 ATM을 이용해야만 입출금이 가능한 통장입니다. 이 통장이 비자금을 만들고 싶어하는, 아내로부터 용돈을 타 쓰는 유부남들에게 알음알음으로 알려져 2년 만에 가입자가 50%나 증가했다는 어찌 보면 귀여운 뉴스였습니다. 필자는 작년 모 은행 행원 대상 강연을 하면서 남편의 공인인증서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꽤 많은 여자 분들이 손을 들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인터넷뱅킹으로 조회되지 않는 통장이 적은 용돈에 시달리는 유부남들에게 얼마나 희소식일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흥미로운 기사에 달린 댓글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이 기사 빨리 내려’였습니다. 멍텅구리 통장을 가지고 있는 유부남이 아내에게 들킬까 봐 다급하게 올린 댓글이었겠지요. 그 댓글에 다시 달린 댓글은 반나절 만에 200개가 넘었는데 거의 모두 ‘큰일 났다. 아내가 이 기사 보겠다’ 같은 또 다른 조바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누라표 압수수색영장이 발급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이 글을 쓴 기자가 아내에게 비자금을 들켜서 같이 죽자고 기사를 썼다는 이야기까지 웃을 수만은 없는 댓글들이 잇달아 올라왔습니다.

팍팍한 살림에 남편의 용돈을 줄여서라도 살뜰히 가정을 꾸려나가려는 아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본인이 벌어온 돈에 대해서도 처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한정치산자(?) 신세인 남편들에게 동정심 같은 측은지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CEO들은 회사 직원들이 이처럼 분투를 벌이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이를 잘 알고 있는 어떤 CEO는 직원들을 포상할 때 월급 계좌로 송금하지 않고 직접 현금을 주는 것으로 더욱 큰 격려를 하신다고 합니다. 봉투를 건네며 흐뭇하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두 사람의 장면이 떠오르는군요.

처지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중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것은 황희 정승의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종이 서로 싸우다 정승을 찾아가 각자 억울함을 호소하자, 정승이 하나씩 듣고 나서 두 사람 모두에게 “네 말이 옳다(黃喜曰 汝言是也)”고 했다가 옆에서 지켜보던 조카가 어찌 두 말이 모두 옳을 수 있느냐, 이쪽 사람의 말이 옳지 않으냐 하니 다시 조카에게 “네 말이 옳다”고 했다던 일화죠. 세상일은 처지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노 재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던 건 아닐까요?

우리는 살면서 상대의 처지에 대해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설이 다가오고 있으니 명절 얘기를 해볼까요. 여러분은 명절에 듣기 싫은 이야기들이 무엇인지 혹시 아시나요?

한 취업포털 사이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학생들이 명절에 가장 듣기 싫은 이야기 순위 1위는 ‘취업은 됐니?’라고 합니다. 그다음으로는 ‘앞으로 계획이 뭐야? 어떻게 살래?’, ‘누구는 좋은 회사 들어갔다더라’, ‘그냥 아무 데나 취업해’ 등이었답니다. 듣기만 해도 답답해지고 짜증이 나는 질문들이지요.

문제는 이 학생이 취업을 한 후에도 듣기 싫은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직장인들이 듣기 싫어 하는 이야기를 다음 조사에서 알 수 있었으니까요. 그 순위 1위는 ‘결혼 안 해?’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는 연봉이 엄청 높다더라’, ‘연봉은 얼마니?’, ‘돈은 많이 모았니?’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다음 얘기도 비슷하지요. 우리 모두 예상하듯이 결혼을 한 뒤에는 바로 ‘애는 안 낳니?’가 따라올 테니까요. 결코 끝나지 않을 불편한 관심이 자신을 공격해 올 것이란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늘 벌어지다 보니 포털사이트에 ‘듣기 싫은 말’이라고 쳐넣으면 추천 검색어들이 우르르 쏟아집니다. ‘고3 추석 때 듣기 싫은 말’, ‘고등학생 설날 가장 듣기 싫은 말’, ‘기혼남성이 가장 듣기 싫은 말’, ‘기혼남성이 주말에 듣기 싫은 말‘ 등 대상과 상황으로 조합된 수많은 듣기 싫은 말들이 넘쳐나는 것이지요.

심지어 ‘욕이 아닌데도 듣기 싫은 말’이라는 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직장은 언제 구할 거니?’, ‘공부는 언제 할거니?’, ‘좋은 대학 가려면 공부해야지. 학원 안 가니?’, ‘성적이 이게 뭐니? 이래서 대학갈 수 있겠니?’, ‘방 치워라’, ‘학원 안 가니?’ 등 독자 분들도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들어왔고, 듣는 순간 바로 짜증이 올라오는 말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알고 계십니까? 그런 말들을 들으며 짜증 내던 우리 세대가 다시 가해자가 되어 그 말을 우리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상대를 괴롭히는 말을 관심이라 부르며 예나 지금이나 계속 주고받고 있는 걸까요? 아무리 좋은 의도로 얘기한다 해도 듣는 사람이 그것을 그야말로 잔소리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폭력이 됩니다. 실제 좋은 의도라 해도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하면 결코 좋은 의도라는 변명만 늘어놓을 수는 없게 됩니다.

배려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우린 오랜 만에 만난 조카에게 평소 관심은 없지만 나름대로 애정은 있다고 믿기에 아주 기초적인 질문을 던지곤 하죠. 하지만 이런 섣부른 애정이 바로 앞서 말한 재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저 그가 처한 상황을 어림짐작하고, 이제 사회에 나갈 시기가 되었으니 당연히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듣는 사람의 감정과 상관없이 던진 작은 관심과 걱정이 ‘선한 엇갈림’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당사자의 문제에 대해서 가장 고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당사자입니다. 주변의 많은 염려와 걱정은 실질적인 대안이 함께 제시되지 않으면 아무리 표현해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처럼의 명절을 즐기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을 수도 있지요. 진정으로 그를 위한다면 한 발자국 뒤에서 말없이 응원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비단 명절에만 이런 엇갈림이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회식자리에서 김 대리에게 직장생활의 비법을 전수해주는 부장님의 반복되는 이야기,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수십 년인데도 교장 선생님 훈화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회장님의 연설, 매출이 떨어질 때마다 주말 산행과 해병대 캠프로 향하는 영업 전진대회 같은 것들도 모두 이런 엇갈림을 만들어냅니다. 이 경우에는 ‘선한’이라는 표현을 붙이기에도 무섭지만요.

상대도 생각이 있고, 심지어 그 생각이 내 것보다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직급의 높고 낮음과 나이의 많고 적음이 결코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직원들의 지각과 지성을 존중하기에, 그리고 그들의 진심이 회사의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진정으로 그들을 응원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은…
송길영 부사장은 사람의 마음을 캐는 Mind Miner이다. 소셜 빅데이터에서 인간의 마음을 읽고 해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나아가 여기에서 얻은 다양한 이해를 여러 영역에 전달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활자를 끊임없이 읽는 잡식성 독자이며, 이종(異種)의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저서로 ‘여기에 당신의 욕망이 보인다 :빅데이터에서 찾아낸 70억 욕망의 지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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