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브랜드 이야기 / 까르띠에

울트라씬 부문에서 두각
세계 신기록 14개 달성

까르띠에는 주얼리에서 시계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 하이브리드 브랜드다. 1904년 최초의 현대식 손목시계 Santos-Dumont을 내놓으면서 시계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98년 리치몬트 그룹에 편입되면서부터 그룹의 핵심 브랜드로 떠올라 시계 업계의 먼치킨 Munchkin (터무니없을 만큼 모든 능력을 다 갖춘) 브랜드로 거듭나고 있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2015년 현재 세계 시계 산업의 패권은 리치몬트 Richemont 그룹과 스와치 Swatch 그룹이 양분하고 있다. 두 그룹은 시계 브랜드 운영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스와치 그룹은 폭넓은 소비자층 공략을 위해 다양한 가격대의 시계 브랜드를 운영하지만, 리치몬트 그룹은 소비자를 상류층으로 한정하고 명품 시계 브랜드 운영에만 집중하고 있다.

리치몬트 그룹이 운영하고 있는 명품 시계 브랜드들 역시 스와치 그룹만큼은 아니더라도 가격대별 포지션이 정해져 있다. 평균 수백만 원대 브랜드도 있지만, 최소 수천만 원부터 시작하는 브랜드도 가지고 있다. 대중적인 명품 브랜드부터 하이엔드라 불리는 최상위급 명품 브랜드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얘기다.

리치몬트는 가격대 외에도 기능별 포지션이 다양하다. ‘A 브랜드는 투르비용 전문’, ‘B 브랜드는 미닛 리피터 전문’ 식으로 기술적 장점을 어느 정도 구분짓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류에서 벗어나 있는 브랜드도 있다. 이 브랜드는 리치몬트 그룹 내의 다른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 장점들을 모조리 다 흡수하고 있다. 일종의 먼치킨 브랜드인 까르띠에가 그 주인공이다.

보석 마스터 출신의 창립자

까르띠에의 역사는 1819년 프랑스 파리의 화약공(火藥工) 집안에서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 Louis Francois Cartier가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당시 파리는 상류층에게 화려함의 상징이었다. 호화로운 파티와 사교계, 염문설 등은 당시 파리 상류층의 분위기를 잘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였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화약공 대신 보석세공사 직업을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보석세공사는 가장 유망한 직종 중 하나였다. 때문에 그는 10대 중반이 되었을 무렵 파리의 유능한 보석 세공사 아돌프 피카르 Adolphe Picard의 아틀리에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그는 타고난 장인이었다. 견습공일 때에도 그에게 맞춤 제작을 의뢰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28살이 되던 1846년, 자신만의 장인(匠人)마크를 만들어 프랑스 상업등기소에 등록했다. 요즘 말로 치자면 디자이너 브랜드를 론칭한 셈이었다. 때문에 일부에선 까르띠에의 시작을 1846년으로 보기도 한다.

1847년 아돌프 피카르가 작고한 후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스승의 아틀리에를 물려받았다. 같은 해 그는 아틀리에의 이름을 ‘메종 까르띠에 Maison Cartier’로 바꿨는데 까르띠에에선 이때를 브랜드 창립의 원년으로 보고 있다.

당시 프랑스 상류층에선 호화로운 치장이 유행했기 때문에 메종 까르띠에는 엄청난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1856년 파리 사교계의 여왕이자 패셔니스타였던 마틸드 Mathilde 공주가 방문하면서 메종 까르띠에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마틸드 공주는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의 보석 세공품에 푹 빠져 첫 방문 이후 메종 까르띠에의 충성고객이 되었다. 마틸드 공주는 메종 까르띠에의 주요 고객이기도 했지만 홍보 대사이자 후원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메종 까르띠에는 마틸드 공주 덕분에 해외 유력인사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됐고, 1850년대 말에는 공주의 추천으로 프랑스 왕실의 보석세공사로 지정되기도 했다.

세계로 뻗어 나가는 까르띠에

1874년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55세의 나이로 은퇴하면서 그의 아들인 알프레드 까르띠에 Alfred Cartier가 메종 까르띠에를 이어받았다.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보석세공사 일을 익히긴 했지만 이를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처럼 보석세공과 경영을 겸하는 대신 전문경영인에 더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그 후 알프레드 까르띠에가 이끄는 메종 까르띠에는 폭발적으로 성장해나갔다. 알프레드 까르띠에가 경영을 맡은 이후 메종 까르띠에는 낱개 점포를 벗어나 기업 수준으로 외형을 크게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1890년대 후반 프랑스 시장의 한계를 느낀 알프레드 까르띠에는 해외시장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해외사업을 맡기기 위해 세 아들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 Louis Joseph Cartier, 피에르 까미유 까르띠에 Pierre Camille Cartier, 자크떼오뒬 까르띠에 Jacques Th′eodule Cartier를 경영에 참여시키고 메종 까르띠에의 상호를 ‘알프레드 까르띠에 엔 필스 Alfred Cartier & Fils’로 변경했다. 이는 ‘알프레드 까르띠에와 아들들’이란 뜻이었다.

세 형제는 1900년대 후반까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해외 지사를 세웠는데 이후 경영에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첫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가 파리 본사를, 둘째 피에르 까미유 까르띠에가 미국을 총괄하는 뉴욕 지사를, 셋째 자끄 떼오뒬 까르띠에가 영국을 총괄하는 런던 지사를 맡았다. 세 형제가 경영의 주축이 되면서 알프레드 까르띠에 엔 필스 상호도 1906년 ‘까르띠에 프레르 Cartier fr′eres’로 변경됐다. ‘까르띠에 형제들’이라는 뜻이었다.

최초의 현대식 손목시계 개발

장자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런 그의 성격은 까르띠에 프레르가 보석 외에 시계 사업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됐다. 특히 그는 최초의 현대식 손목시계로 꼽히는 Santos-Dumont을 개발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Santos-Dumont은 까르띠에 프레르가 만든 첫 시계는 아니었다. 까르띠에는 이전에도 시계를 만들긴 했지만, 이들은 시계라기보단 보석 세공을 위한 바탕 장신구의 성격이 강했다. 금팔찌 귀퉁이에 시계가 붙어 있는 식이었다. 때문에 시계 업계에서도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겐 알베르토 산토스-뒤몽 Alberto Santos-Dumont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기인이자 비행모험가로 유명했다.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은 1901년 자신이 직접 제작한 열기구를 타고 에펠탑 주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 유명해졌는데, 이듬해인 1902년에는 자신의 다음 비행 계획 수립에 친구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를 동참시켰다. 그는 이 자리에서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에게 비행에 적합한 시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만 해도 휴대용 시계들은 회중시계가 대세였다. 특히 남성들은 회중시계가 손목시계보다 더 점잖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회중시계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손목시계들은 발전이 더뎌 회중시계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회중시계의 크기를 줄이고 위아래 여유 공간을 만들어 거기에 줄을 고정해 차고 다니는 식이었다. 꽤 투박했던 셈이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나토밴드 시계를 연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이때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는 한순간도 전방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비행 상황을 고려해 회중시계 대신 손목시계를 만들었는데, 이 시계는 기존의 손목시계 모양과는 꽤 차이가 있었다. 케이스에 줄을 건 게 아니라 끼운 형태였다. 또 러그가 손목 방향으로 부드럽게 굽어 있는 등 돋보이는 디자인을 갖추고 있었다. 이 시계가 세상에 공개된 건 1904년의 일이었다.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은 이 시계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가 세상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다 보니 여러모로 시계 홍보 효과는 클 수밖에 없었다. 이는 까르띠에 프레르가 시계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재 우리가 까르띠에 시계를 볼 수 있게 된 데에 기인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의 공이 컸던 셈이다.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는 이 시계에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의 이름을 따서 Santos-Dumont이라 명명했다.

까르띠에의 시그니처 아이콘, 팬더

표범이 까르띠에의 시그니처 아이콘이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까르띠에 매장에선 이 표범을 팬더 Panthh′ere라고 부르는데, 팬더는 표범을 뜻하는 프랑스어 표현이다. 중국의 판다 Panda나 퓨마나 흑표범 등을 뜻하는 영어표현인 팬더 Panther, 여성 장신구인 펜던트 Pendant와 발음이 유사해 많은 사람이 각기 잘못된 뜻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까르띠에의 팬더는 정확히 표범이 맞다.

팬더는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의 연인이었던 잔느 투생 Jeanne Toussaint의 애칭이었다. 과거 프랑스에선 팬더가 관용적 표현으로 ‘요부’를 뜻하기도 했는데, 이는 잔느 투생의 이미지와도 어느 정도 일치했다. 1887년생인 잔느 투생은 1875년생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보다 12살이나 어렸지만, 귀여운 숙녀보다는 날카롭고 앙칼진 모습으로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는 잔느 투생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1914년 팬더 장식이 들어간 여성 시계 Panth′ere를 출시했다. 이는 까르띠에에서 팬더 모티프가 형상화된 최초의 상품이었다. 1933년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는 잔느 투생을 까르띠에 프레르의 디자인 디렉터로 영입했는데, 이때 잔느 투생이 팬더를 모티프로 다양한 상품을 내놓음으로써 팬더는 까르띠에의 시그니처 아이콘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가족경영체제의 막을 내리다

까르띠에 프레르는 1921년 까르띠에 S.A. Cartier S.A.로 또 한번 상호가 바뀌었다. 이전 상호에 들어간 ‘형제’라는 의미의 ‘프레르’가 후대 경영자들이 사용할 회사명으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1년 후인 1942년, 세 명의 3대 경영자들 중 첫째와 셋째인 루이 조제프 까르띠에와 자크 떼오뒬 까르띠에가 세상을 떠나면서 까르띠에 S.A.는 자연스럽게 4세 경영인 체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4대째에 접어들면서 까르띠에 S.A.의 지분은 까르띠에 가문 밖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962년 미국법인이 먼저 날아갔고 1966년에는 본사인 프랑스법인마저 외부 투자자들에게 넘어가 1960년대에 까르띠에 가문이 운영하는 까르띠에 S.A.는 영국법인 하나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법인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프랑스법인은 1970년대 초부터 까르띠에 S.A.를 통합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결국 1974년 영국법인을, 1976년 미국법인을 흡수하면서 1979년 통합법인 까르띠에 몽드 Cartier Monde를 출범시켰다. 몽드는 프랑스어로 ‘세상’을 뜻한다. 프랑스법인을 주도하며 까르띠에 통합에 앞장선 프랑스 출신 금융가 조셉 카누이 Joseph Kanoui가 그 후 까르띠에 몽드의 CEO를 맡았다.

리치몬트 그룹의 등장

쿼츠 파동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1980년대, 담배 재벌로 유명한 안톤 루퍼트 Anton Rupert 램브란트 Rambrant 회장은 명품업계 투자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시계업계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수년간 여러 산업에서 닥치는 대로 인수합병을 주도해오던 그는 1988년에 명품 시계 브랜드 지주사 리치몬트를 설립했다. 세계 시계업계에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이때 리치몬트는 까르띠에 몽드의 지분도 상당수 확보해 자사의 지배 아래에 두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8년, 그룹사가 된 리치몬트는 초고가 명품 시계 브랜드를 여럿 소유하고 있던 방돔 럭셔리 그룹 Vendo^me Luxury Group마저 흡수하며 당대 최고의 위세를 떨치던 스와치그룹의 유일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이후 리치몬트그룹은 몇몇 브랜드들을 더 흡수하면서 현재 스와치그룹과 막상막하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리치몬트그룹의 대장 브랜드

리치몬트그룹은 자사보다 먼저 대규모 그룹을 이룬 스와치 그룹의 브랜드 운영방식을 많이 벤치마킹했다. 물론 위기의 시계 브랜드들이 벼랑 끝에서 뭉쳐 기사회생한 스와치그룹과 세계 명품시장의 성장에 베팅하는 과정에서 설립된 리치몬트그룹이 같은 길을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스와치그룹의 브랜드별 포지셔닝이나 지원 볼륨 조절 등은 리치몬트그룹에도 운영상의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리치몬트그룹이 특히 주목한 건 주력 브랜드에 대한 독특한 지원방식이었다. 스와치 그룹은 가장 인지도가 높고 이미지가 좋은 특정 브랜드에 그룹의 역량을 집중시켜 해당 브랜드가 창출한 이익을 바탕으로 그룹 전체가 성장하는 식의 운영을 해오고 있었다.

이는 일반 기업에선 흔한 경영 전략이지만 그룹사 입장에선 구사하기에 매우 까다로운 방법이다. 단일 제품에다 브랜드 구성까지 단조로운, 특히 고급 시계 브랜드로만 구성된 리치몬트 그룹으로선 적용하기에 더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이는 경쟁체제를 통해 각 브랜드의 발전을 모색하려했던 안톤 루퍼트 회장의 초기 경영전략과도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스와치그룹이 이 전략으로 고도성장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리치몬트그룹 역시 이 방법을 받아들였다. 리치몬트그룹 중에선 까르띠에가 가장 인지도가 높고 이미지가 좋았다. 따라서 까르띠에는 자연스레 리치몬트그룹의 대장 브랜드가 됐다. 리치몬트그룹의 지원이 집중되면서 이후 까르띠에는 기술이나 규모 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까르띠에는 2000년 이후 브랜드 가치가 가장 많이 오른 시계 메이커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까르띠에의 업그레이드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까르띠에는 리치몬트그룹의 인수합병이 있을 때마다 기술적으로 장족의 발전을 이뤄왔다. 인수 기업들의 기술적 장점을 모조리 흡수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리치몬트그룹 내 다른 브랜드에서 종종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포지션이 한정된 여느 브랜드들과 달리, 까르띠에는 시계의 모든 분야에서 완전체가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까르띠에의 상승세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