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옹호자와 링게르만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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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학 서울대 경영대 교수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회식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이때 우리나라 조직문화에서 발견되는 재밌는 현상이 하나 있다. 부장이 자장면을 시키면 과장도 자장면을 시키고, 그러면 그 밑으로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물어볼 것도 없이 자장면으로 통일돼 버리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상하관계가 명확한 기업조직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친목조직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일부 구성원은 자장면 대신 짬뽕이나 볶음밥을 먹고 싶어도 분위기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다수의 의견에 따르게 된다.

물론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유명한 실험도 있었다.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쉬운 문제에 가짜 실험 참가자들이 똑같이 잘못된 의견을 무리 지어 말하면, 진짜 실험자는 속으론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똑같이 잘못된 의견을 답으로 내놓는 경향을 보였다. '둘 중 어느 막대기가 더 길어 보이냐?', '둘 중 어느 색이 더 빨간색에 가까우냐?'같은 단순한 질문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다수의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은 기업의 의사결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특정 안건에 대해 '전체 주장과는 반대되지만 탁월한 의견'을 가진 임원이 다수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삼키는 사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인텔 Intel의 CEO였던 앤디 그로브 Andy Grove는 이런 현상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중요한 임원회의가 있을 때 반대 의견을 말할 외부인을 일부러 참석시키는 다소 이상한 방법을 쓰기도 했다. 임원들은 이 외부인이 토의 안건에 강력한 반대 의견을 제시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내놓았다. 회의의 질적 수준이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렇게 반대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악마의 옹호자(Devil's Advocate)'라고 부른다. 이 말은 기독교에서 처음 등장했다. 기독교에는 신앙의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을 성인으로 인정하고 추대하는 과정이 있는데, 이 성인 심사 때 의무적으로 몇 사람이 반대 의견을 제시하게 해 형식적이기 쉬운 추대과정을 공론의 장으로 만들었다. '성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반대하니 악마를 편드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악마의 옹호자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이 제도는 여러 의견을 모으고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던 셈이다.

앤디 그로브가 참석시킨 반대 의견을 말하는 외부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그는 말단 직원도 얼마든지 CEO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때로는 직원들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는 그 직원들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했다. 인텔 내에선 이런 격론을 '건설적인 대립(Constructive Confrontation)'이라고 불렀다. 이런 기업 문화를 통해 앤디 그로브는 오늘날 최고의 기업 중 하나로 꼽히는 인텔의 초석을 쌓았다.

영화 제작업체인 픽사 Pixar에서도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제작 중간 평가회의 참석자들은 의무적으로 제작 중인 영화의 좋은 점 다섯 가지와 문제점 다섯 가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모든 참석자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각 내용에 대해 난상토론이 이어진다. 픽사는 이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제작하는 영화의 품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고 공언한다.

위 사례와 달리 우리나라 기업문화에선 회의가 길어질수록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때문에 임원회의에서도 반대의견이 거의 제시되지 않는다. 눈치를 보다가 윗사람이 의견을 제시하면 모두 'Yes'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임원회의가 열에 아홉이다. 링게르만 효과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셈이다. 링게르만 효과는 조직에 속한 개인이 '내가 이야기하거나 열심히 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알아서 잘하겠지'하는 식으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현대카드는 이런 기업문화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정해진 자리가 없는 회의실이다. 현대카드 회의실에는 정해진 자리가 없어 회의 참석자들이 대학교 강의실처럼 들어오는 순서대로 원하는 자리에 앉는다. 회의에 참석한 이상 똑같은 구성원일 뿐, 상급자나 하급자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회의실에서만큼은 참석자 간 상하관계를 따지지 말고 수평적 관계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하라는 뜻이다.

현대카드 회의실에는 기독교의 ‘악마의 옹호자’ 제도처럼 반대 의사 표현 장치도 마련되어 있다. 어떤 부서가 특정 안건을 발표하면 정해진 순번에 따라 다른 부서의 임원이 그 안건에 대해 반드시 문제점을 지적해야 한다. 반대자로 정해진 임원은 안건의 내용을 미리 확인해 사전에 많은 검토를 한 후 참석하기 때문에 안건을 준비한 부서와 팽팽한 논리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이들의 갑론을박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다른 참석자들도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데 주저함이 없어져 회의는 역동적인 의견 교환의 장으로 변하게 된다. 현대카드는 형식적인 반대 발표를 방지하기 위해 반대 발표의 질적인 수준을 수치화해 임원 평가 때 반영하고 있다.

현대카드는 이들 제도를 도입한 후 회의가 활성화되어 경영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역동적인 의견 교환을 통해 임원들이 회의 안건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예전 같았으면 별다른 제지도 받지 않고 통과되었을 함량 미달의 정책들이 많이 걸러지거나 보완돼 실행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로운 의견 교환은 기업의 경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세계적인 컨설팅 업체 액센츄어 Accenture가 뽑은 '망하는 기업의 특징' 중 하나도 '상사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없는 직장 문화'였다. '호령은 대대를 움직이지만, 경청은 산을 움직인다'는 유명한 서양 격언은 자유로운 의견 교환의 힘을 암시한다. 최고경영자는 모든 일을 다 알 수도 없고 천재도 아니기 때문에 이 힘을 빌려야 한다. 다른 직원들의 의견을 듣고 그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요할 때 더욱 우수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세종대왕은 임기 동안 1주일에 1회 정도 경연을 열어 학자 및 대신과 함께 국사를 논의했다. 세종의 배려로 경연에서는 매우 생산적인 토론이 이뤄졌다. 세종은 자신이 먼저 의견을 제시하면 다수의 대신이 그 의견에 무조건 찬성하는 경향을 발견하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다른 사람의 의견인 양 제안서를 만들어 토론했을 정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경연 중 종종 난상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세종대왕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대신도 항상 대화를 통해 설득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경연을 열린 토론의 장으로 만들었다. 세종시대의 태평성대는 이 경연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이에 비해 세종 임종 5년 후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임기 초기에만 몇 차례 경연을 열었을 뿐이다. 어쩌다 열린 경연에서도 논쟁이 지루하다 하여 얼마 후에는 아예 경연 자체를 없애버렸다. 세종 대에 만들어 놓은 뛰어난 정책기구 겸 의견 수렴 장치를 스스로 폐지한 것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의견에 쉽게 동조하는 신하들하고만 국사를 진행하다 보니 종국엔 독불장군 정치로 이어졌다. 세종과 극명한 차이를 보인 셈이다. 후대에 세종과 세조 둘 중 누가 더 성군으로 칭찬받고 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신혼 초기 아내와 의견 충돌이 생겼을 때 크게 화를 내며 호령해본 경험이 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기만 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수차례 이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이 과정을 통해 부부간에도 서로의 의견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도 아내와는 많은 의견 교환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내는 때때로 필자에게 따끔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물론 필자를 위해서 하는 비판이다. 필자는 아내의 비판을 통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할 수 있었고, 혼자서는 배울 수 없었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항상 아내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부부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기업도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영위하려면 경영자가 구성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결정권자라도 접하는 정보가 제한적이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직원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요즘처럼 부서 간 유기적인 협업이 중요해진 시기엔 더욱 그렇다.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또 의견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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