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와 아마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FORTUNE'S EXPERT] 송길영의 '세상 사는 이야기'

요즘 나오는 방송을 보면 콘텐츠 공급자와 수요자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누가 프로이고 누가 아마추어인지, 누가 생산자이고 누가 소비자인지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그 세태가 궁금해 곰곰이 이유를 한번 따져 보았습니다.


개그우먼 김숙과 송은이의 ‘비밀보장’이라는 방송을 들어보셨나요? 방송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어느 방송국에서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참 난감해집니다. 사실 전파를 타는 ‘진짜’ 방송은 아니거든요. 인터넷에서 다운로드를 해서 듣는 팟캐스트입니다. 현행법상 전파를 타야 방송으로 분류된다고 하니, 우리가 편의상 인터넷 방송이라고 부르는 팟캐스트는 엄밀히 말해 방송은 아닙니다. 팟캐스트는 최근 몇몇 프로그램이 정규 방송 못지않은 인기를 끌면서 대중화가 가속된 새로운 콘텐츠 유통채널입니다.

다시 비밀보장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20년 절친인 김숙과 송은이의 비밀보장 팟캐스트가 요즘 장안의 화제입니다. 이 콘텐츠를 직접 들어보면 이것을 방송이라고 해야 할지, 친구들 사이의 농담이라고 해야 할지 분간이 잘 안 됩니다. 2015년 4월에 시작해 이제 채 반년이 안된 이 방송은 ‘프로의 아마추어화’에 가장 적합한 예시인 듯합니다.

비밀보장은 전혀 상업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상업적인 퀄리티를 가진 방송입니다. 게릴라 같은 키치(Kitsch)적 방송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광고조차도 키치적 발상으로 직접 녹음한 ‘날것’ 그대로를 씁니다. 광고가 있을 턱이 없던 방송 초기, 알음알음으로 유치한 지인의 감자탕 식당 광고에선 주인이 직접 녹음한 메시지가 주위의 웃음소리와 함께 전달됩니다. 진행자들의 동료인 한 개그우먼이 자신의 남자친구를 구하는 광고에까지 이르면 어디까지가 광고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이런 솔직함과 엉뚱함 덕분에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나지 않아 팟캐스트 랭킹 1위에 올랐고, 이후에도 꾸준히 10위권 이내에 머무르는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비밀보장은 청취자가 직접 녹음해 보내온 고민을 듣고-심지어 처음에는 청취자가 전무한 관계로 타 게시판에 아직 해결책이 올라오지 않은 고민을 훔쳐오기까지 했습니다-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전화로 연결해 의견을 들은 후, 진행자가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렵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은 학생이 ‘이 돈을 어떻게 해야 잘 쓰는 걸까요’라고 물어봅니다. 비밀보장에선 연예계에서 가장 알뜰하기로 소문난 방송인 김생민 씨에게 전화를 걸어 해결책을 다시 묻습니다. 김생민 씨는 ‘ 돈은 쓰는 것이 아니라 모으는 것이니 쓰지 말라’는 충고를 해줍니다. 다소 엉뚱한 해결책도 등장하지만, 비밀보장에선 이를 있는 날것 그대로 내보냅니다. 그것이 비밀보장의 매력이니까요.

이 방송은 최소한의 비용만을 들여 작가와 엔지니어, 그리고 진행자만으로 제작하다 보니 저작권을 지불해야 하는 상업적 음원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신 청취자들이 보내거나 직접 녹음한 음원을 틀어줍니다. 그 음원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개그우먼 이영자의 한탄부터 청취자가 자신의 애완견이 사과 먹는 소리를 녹음한 것까지 매우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방송이 가지고 있는 우아한 이미지, 그 성역을 거부하는 것이지요.

요즘에는 비밀보장처럼 일종의 ‘쓸데없음’이 프로 작가와 프로 엔지니어, 그리고 프로 진행자와 결합되어 ‘고품격 병맛(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인터넷 유행어)’ 프로그램으로 완성되는 사례가 자주 눈에 띕니다. 프로가 아마추어화 되는 현상 말입니다. 물론 프로방송인들이 아마추어 같아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마추어적인 장치와 느낌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방송이라는 창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싶을 때 관문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그 문이 너무 좁아 문을 지키는 자(Gate Keeper)들의 주관이 개입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납니다. 때문에 이미 프로가 된 사람들이 메인스트림에서 벌어지는 경쟁을 피하고자 차고에서 창업을 하는 식의 ‘벤처’를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방송 기획자가 웹드라마로 먼저 시장을 탐색해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슈가 되면 정규방송으로 편성하는 것처럼, 파일럿 프로그램 테스트를 기존 방송이 아닌 인터넷으로 시행하는 것으로 다변화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기존 방송국이 점점 힘을 잃고 있다는 전조가 아닐까요. 앞서 다소 뜬금없이 방송과 팟캐스트 이야기를 슬쩍 집어넣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프로가 프로의 형식으로 꾸미는 방송국이 힘을 잃고 있는 대신, 프로가 아마추어의 형식을 빌리는 인터넷 팟캐스트가 그 힘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비밀보장 사례와는 반대로 ‘아마추어의 프로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어 주목을 끕니다. 바로 MBC에서 방영되고 있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이 좋은 예입니다. 마리텔의 기본 콘셉트인 아프리카 TV는 재능 있는 아마추어가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일반인들에게 제공하는 1인 미디어 플랫폼이었습니다. 이러한 1인 미디어는 그 수준이나 투자 정도가 공중파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주로 B급 콘텐츠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미디어의 흐름이 Broadcasting에서 Ondemand로 이동하면서, 인터넷을 통한 상호작용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오면서, 그 흐름을 읽은 공중파가 인터넷 방송을 흡수한 새로운 변종 콘텐츠 마리텔을 생산해냈습니다.

마리텔의 형식은 먼저 인터넷 방송을 하고, 그 결과를 편집해서 공중파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여러 방송 출연자 중에서 개그맨이나 가수처럼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프로 방송인들보다 평생 요식업을 해 온 백종원 씨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방송의 프로가 방송의 아마추어에게 잡아먹힌 셈입니다.

1인 방송은 그 특성상 다른 장치 없이 오롯이 혼자(경우에 따라선 여럿이) 2시간 여를 채워나가야 합니다. 대본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이야기만으로 시청자를 몰입시키는 건 보통의 공력으론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방송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반인이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면, 더구나 그 일반인이 한 가지 일을 수십 년간 해온 프로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방송은 아마추어지만 실제 본업에선 프로이기 때문에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낼 수 있을 겁니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 Daniel Pink는 그의 저서 ‘파는 것이 인간이다(To sell is human)’에서 인간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팔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의 말에 비춰보면 평생을 한 가지 일에 몰두해온 백종원 같은 아마추어 방송인은 자신을 멋지게 팔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이 프로그램에 종이접기의 달인 김영만 씨가 나왔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는 김영만 씨가 나온 마리텔의 정규 방송이 아직 방영조차 되지 않았지만, 온라인 세상에선 그의 어록을 퍼 나르는 트윗이 하루에만 14만 개가 넘을 정도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종이접기를 따라 한 어린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김영만 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향수를 느낍니다. ‘김영만 씨 방송을 보면서 어린 시절 순수했던 나를 떠올렸다’ 는 트윗이 오가는 걸 보면서 김영만 씨의 인생은 누군가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김영만 씨의 사례는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그 묵직함, 그 무게의 전문성은 결코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이러한 전문성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킨다는 진리를 새삼 일깨워 줍니다.

여기서 간단한 질문. 마리텔처럼 이미 인터넷으로 공개된 콘텐츠가 공중파에서 다시 방송을 타는 건 유용할까요? 물론 유용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용할까요? 바로 여기서 새로운 가치, 기회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실은 단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Esgibt keine Wahrheit, da alle Wahrheit nur subjektiv ist)’라는 니체의 말처럼, 인터넷으로 공개된 콘텐츠에 제작진의 해석이 다시 들어가면 이전의 날것에 가까웠던 콘텐츠는 새로운 ‘기획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자막이나 편집, 그리고 배치와 같은 후공정 작업을 통해서 말이죠.

이처럼 1차 콘텐츠를 재해석해서 만들어진 2차 콘텐츠가 우리가 방송을 통해 만나게 되는 마리텔 프로그램입니다. 스포츠 중계의 하이라이트를 보는 것과 유사한 것이죠. 1차 콘텐츠와는 달리 제작진의 해석이 덧붙여지면서 1차 콘텐츠 때와는 또 다른 의미가 전달됩니다. 여기에 요즘 ‘ 마리텔식 자막’으로 회자 되는, 절대 빠질 수 없는 병맛 코드 자막이 조미료로 첨가되면 2차 콘텐츠는 더욱 맛깔나게 변하게 됩니다.

기술의 발달과 매체의 접근성은 콘텐츠 공급자와 수요자 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가 프로이고 누가 아마추어인지, 누가 생산자이고 누가 소비자인지 구분이 없어진 시대입니다. 피아의 구분 없이, 그저 재주가 있고 뜻이 같은 자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세상이 도래한 지금, 마치 원시의 축제처럼 모두가 함께 즐기는 진정한 평등이 시작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모든 아마추어들의 성공 확률이 동등해졌다’고 해석하는 우를 범하진 마시길 바랍니다. 그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선 어떠한 분야라도 반드시 프로의 전문성을 갖춰야 하고, 거기에 아마추어처럼 실험하고 파괴하는 유연함까지 필요하다는 말이니까요.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은…
송길영 부사장은 사람의 마음을 캐는 Mind Miner이다. 소셜 빅데이터에서 인간의 마음을 읽고 해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나아가 여기에서 얻은 다양한 이해를 여러 영역에 전달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활자를 끊임없이 읽는 잡식성 독자이며, 이종(異種)의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저서로 ‘상상하지 말라 - 그들이 말하지 않는 진짜 욕망을 보는 법’이 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