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 수상은 문화예술에 더욱 봉사하라는 채찍"

부산국제영화제를 세계적인 영화제로 만든 김동호 위원장이 최근 제24회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을 수상했다. 40여 년간 문화예술계를 위해 일해 온 김 위원장에게 바치는 존경의 의미가 이 상에 담겨있다. 김동호 위원장을 만나 수상 의미를 들어봤다. 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문화예술 부문의 활동을 격려하고 지지해달라는 의미로 상을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은 생애 동안 문화예술 분야 발전을 위해 더욱 봉사하고 낮은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24회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을 받은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의 말이다.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은 독일 만년필 브랜드 몽블랑이 수여한다.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고 노력해온 후원자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1992년 몽블랑 문화재단이 제정했다. 수상자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멕시코, 스페인, 스위스, 영국, 미국 등 11개국에서 매년 한 명씩 뽑는다.

지난 7월 23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만난 김동호 위원장은 부드러운 어투와 겸손한 태도가 돋보였다. 올해 78세인 그는 지난해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3년 전에는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대학원장을 맡아 후학도 양성하고 있다.

김동호 위원장을 대표하는 단어는 뭐니뭐니해도 ‘부산국제영화제’다. 그는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들고 15년 동안 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루츠 베트게 몽블랑 문화재단 이사장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한국영화에 주목해 10여 년간 그 발전에 기여한 김동호 위원장을 한국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그의 업적을 치하했다.

김동호 위원장은 말한다. “몽블랑 만년필은 역사를 기록하는 대표 필기구라고 생각해요. 부산국제영화제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영화제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함께 일한 스태프와 자원봉사자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수상 소식을 듣고 당황하고 망설이기도 했어요. 과연 저에게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망설였기 때문입니다.”

김 위원장은 과거에도 이미 많은 문화예술 관련 훈장과 상을 받은 바 있다. 그에게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은 어떤 의미일까. “앞서 받았던 훈장과 상들은 제가 공무원으로, 혹은 준공무원으로 했던 일들에 대한 평가였던 것 같아요. 이번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은 앞으로 문화예술 분야에 더 적극적으로 후원 활동을 펼쳐달라는 뜻으로 주신 것같습니다. 나머지 삶을 문화예술계를 위해 봉사하고 도우면서 지내는 것이 이 상을 받은 취지에 보답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동호 위원장은 영화를 포함한 문화예술계에 매우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이번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을 받으면서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 펜(Patron of Art Edition)’과 문화예술 후원금 1만5,000유로(약 1,900만 원)을 부상으로 받았다. 김 위원장은 이를 연극인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기부할 예정이다. 김 위원장은 말한다. “우리나라 연극인들은 낮은 소득 탓에 직업인으로서 자기계발이나 재교육을 받을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금은 ‘연극인 복지재단’에 기부할 계획이에요.”

김 위원장은 인터뷰 내내 힘들게 생활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2012년 정부에서 240억 원 가량을 들여 예술인복지재단을 만들어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예산을 더 늘리고 지원절차도 간소화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제가 위원장으로 있는 문화융성위원회에서 정책 건의를 올릴 겁니다. 콘텐츠 산업을 지원하려면 펀드가 있어야 해요. 정부에서 500억 원 정도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한·중의 특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 글로벌 펀드도 2,000억 원을 목표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집념과 오기로 만든 부산국제영화제
김 위원장은 영화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부산에 국제영화제를 만든 장본인이다.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부산국제영화제로 초대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프랑스로 날아가기도 했다. 영화제 기간 오토바이를 타고 부산 전역을 누비며 참가자들의 술자리를 챙긴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떠올리며 웃었다. “첫 회 영화제 회의를 마치고 나니 밤 12시였어요. 식당들이 다 문을 닫아서 부산 남포동에 있는 한호텔 앞길에 신문지 깔아놓고 포장마차를 불렀습니다. 세계적인 감독, 배우들과 밤새 소주를 마셨어요. 그날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만나면 지금도 그때 ‘스트리트 파티’가 정말 좋았다고 해요. 영화제 2~3회 때는 아예 길에서 파티를 했습니다.” 그는 남포동과 해운대를 1시간 안에 오가야 했다. 물리적으로 맞출 수 없는 시간이었다. “교통 체증이 심한 곳이었어요. 그래서 택배 오토바이를 불러 뒤에 타고 남포동과 해운대를 오갔습니다. 이후 3년 동안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택배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죠.”

김 위원장이 2010년 1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끝으로 퇴임하자 이창동 감독은 열정을 쏟아 부은 그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마련했다. 영화제 시작을 알리는 짧은 영화인 ‘리더 필름’이었다. 김 위원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레드카펫을 밟고 영화제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영화였다. 김 위원장의 퇴임식에는 특별히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도 참석했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상을 받은 여배우와 함께 술을 마시며 1시간 동안 ‘ 막춤’ 을 췄어요. 얼마나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지 몰라요. 평생 잊을 수 없죠.”

그는 두주불사다. 69세까진 한 자리에서 25%짜리 소주 80~100잔을 마셨다. 10~15병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는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도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하루 7~8게임씩 테니스를 치고 있다고 했다. 평일에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짧게는 20분에서 길게는 1시간 정도 뛰고 걷는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오토바이를 타고 현장을 누비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한다는 건 보통 열정으로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집념과 오기라고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시작할 땐 주변 모든 사람들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오기가 생겼죠. 처음 부산영화제를 만들 때 예산이 22억 원 들어갔습니다. 이 중에 부산시에서 3억 원을 받았어요. 나머지는 모두 협찬으로 충당했죠.” 그는 제일 먼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인 정희자(아트선재센터 관장)씨를 찾아갔다. 영화제를 성공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하고 8억 원을 주면 대우영화제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결국 그는 3억 원을 후원 받을 수 있었다.


문화예술계를 위한 외길 인생
그는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왔다. 그는 자신이 거창한 꿈을 가지고 살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주인공 덕수와 같은 삶을 살았다. 중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4 후퇴 때 어머니와 함께 인천에서 화물선을 타고 와 부산 피난민 수용소에 정착해 살았다. 흩어졌던 가족은 다행스럽게 피난민 수용소에서 모두 재회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 법과대를 졸업했다. “부산에서 살 때 행상을 했어요. 대학 다닐 때도 방 한 칸에서 네 식구가 함께 생활했습니다. 사법고시 같은 걸 준비할 여유는 없었어요. 무조건 직장을 잡는 게 우선이었죠.” 그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 제일 먼저 채용 공고가 난 곳이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였다. 생활인이 되기 위해 그는 말단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을 하다 보니 승진이 빠른 편이었다. 35세에 국장이 됐다.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을 8년 하다 승진이 막혀 옷을 벗었다. 그는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8년이었다. “그 때 ‘ 이제 나는 영화인이 되어야겠다’ 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화인들의 현안을 파악해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세웠습니다. 그때의 경력을 바탕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까지 맡게 된거죠. 내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김 위원장은 몇 년 전 영화 심사를 위해 터키 이스탄불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도 꺼냈다. “마침 고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 국빈방문을 했을 때여서 조찬을 같이 했습니다. 노 대통령이 저보고 ‘영화제를 맡은지 얼마나 됐냐’고 물어보길래 ‘근 10년 넘었다’고 대답했어요. 노 대통령이 ‘ 어떻게 하면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느냐’ 고 농담조로 묻더군요.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창의적인 생각을 갖고 최선을 다해 나가면 그 분야에서 뭔가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게 쌓이면 또 다른 역할을 맡게 되고요. 또 다시 그곳에서 성취를 이루면 결국 국가나 단체에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커리어를 연장시키는 길이죠.”

그는 1992년 문화부 차관으로 다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김동호 위원장은 문화부 재직 기간 동안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하고 문화예술위원회를 설립해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했다. 예술의전당 같은 문화기반시설도 건립했다. 김 위원장은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문화예술에 봉사할 생각이다. “그동안 국가와 여러 단체로부터 혜택만 받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문화예술계에 봉사하고 후원하는 삶을 살 생각이에요. 장편영화를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몽블랑이 문화예술 후원사업을 하는 이유는 …
루츠 베트게 몽블랑 문화재단 이사장은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것이 명품으로서 브랜드 이미지 유지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이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하는데 사용하는 돈은 결코 비용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혁신은 예술에서 오고,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의미 있는 투자라는 게 그가 가진 생각이다. 루츠 베트게 이사장은 “몽블랑이 단순한 필기구 브랜드로만 남았다면 한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명품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고급 문화를 선도한다는 이미지가 몽블랑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도 서예 같은 손글씨 전통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손글씨가 지닌 감성은 디지털 시대에도 유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몽블랑코리아는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 시상식과 함께 한국 지사 출범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지난 1년간 성과와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실방 코스토프 몽블랑코리아 사장은 “한국시장은 매출이 매년 두 자릿수로 성장하는 ‘뜨는 시장’이다. 내년에도 이 같은 성장세를 이어나가겠다”며 “만년필과 시계 시장을 중심으로 럭셔리 브랜드 내 남성 액세서리 시장 리더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고 밝혔다.

몽블랑코리아는 올해 신제품 400개 이상을 선보인다. 한국어 웹사이트 개편과 SNS 채널 강화 등 디지털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한국 소비자와의 소통에도 더욱 힘을 쏟을 예정이다. 특히, 몽블랑코리아는 전통적인 스위스 시계 제조 전통을 기반으로 포르투갈 출신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 (Vasco da Gama)에서 영감을 얻은 시계 ‘헤리티지 크로노메트리 바스코 다 가마 에디션’을 선보여 몽블랑 브랜드 정체성을 계승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한국 시장 내 럭셔리 시계 시장의 성장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또 백화점과 면세점, 홀세일 등 3개 채널로 운영 중인 유통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국 시장 내 점유율 강화에 더욱 집중할 계획이다. 몽블랑코리아는 고객 접점 확대에 집중해 국내 지사 출시1년 만에 백화점 매장 30곳, 면세점 매장 14곳, 홀세일 매장 10곳 등 총 54개 판매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24회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 펜은 …
몽블랑은 문화예술 발전에 노력한 이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리고자 고심했다. 이를 위해 독일 함부르크에 위치한 ‘몽블랑 인터내셔널 아티장 아틀리에’ 장인들이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 펜(Patron of Art Edition)’을 한정 수량 제작하고 있다.

이번 24회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 펜은 ‘루치아노 파바로티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이 펜은 지난 50년 동안 전설적인 테너이자 예술 후원가였던 파바로티의 개성과 열정을 기리는 오마주다. 특히 98자루만 생산된 ‘루치아노 파바로티 리미티드 에디션 98’은 그가 1998년도 받은 ‘그래미 레전드 어워드’를 기념하고 있어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리미티드 에디션 98’은 파바로티가 선보인 명연 중 하나인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이미지를 차용했다. 투란도트 공주를 위한 음악적 모티브인 쟈스민 꽃을 펜 몸통 윗부분(콘)에 ‘750 솔리드 골드(75% 순도를 가진 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18K와 같다)’로 장식했다. 오페라 무대에 보였던 벨벳 커튼은 만년필 뚜껑과 몸통 부분의 붉은색 래커로 표현했다. 750 솔리드 골드 펜촉에 섬세하게 새긴 파바로티 초상은 그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김동호 위원장이 뽑은 영화 7선
부산국제영화제 일선에서 물러난 김동호 위원장은 현재 ‘명예 집행위원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임권택 감독이 1981년 만든 ‘만다라’를 꼽았다. 그는 만다라가 임 감독이 만든 대표작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배용균 감독이 1989년 만든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다. 배용균 감독이 혼자 시나리오 쓰고 촬영하고 감독한 영화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을 받은 작품으로 미학적으로 뛰어난 영화라고 평가했다. 흥행과 작품성을 겸한 영화로는 봉준호 감독이 만든 ‘살인의 추억’을 치켜세웠다.

외국 영화로는 이탈리아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이 만든 ‘인생은 아름다워’를 추천했다. 극한의 비극적인 상황을 희극으로 만들어서 매우 감명 깊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 만든 ‘천국의 아이들’도 감명 깊게 봤다고 했다. 스콧 힉스 감독이 1996년 만든 ‘샤인’은 예술가의 삶,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소개했다. 최근 영화로는 올해 아카데미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이다’라는 폴란드 흑백 저예산 영화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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