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한마디에 올스톱… 수장공백 사태 확산

금융공기업·가스공사 등 인사 지연으로 개점휴업
내부반발 갈수록 거세져


박근혜 대통령이 공공기관에 내정된 관료 출신에 대해 전면 재검토를 지시한 뒤 각 기관 인사는 중단된 상태다. 취임이 유력했던 내정자들의 탈락설이 돌고 각 부처는 청와대 하명만 기다리며 인사에 손을 놓았다. 이 때문에 일부 공공기관은 수장이 없는 파행을 맞고 있다.

4일 현재 임기 만료를 코앞에 둔 공공기관 가운데는 아예 후임자 인선절차를 밟지 않는 곳이 많다. 통상 한달이 걸리는 후보자 검증, 면접 등을 감안하면 드문 일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차관은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는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분위기"라며 "특히 인사같이 민감한 사안은 청와대의 방침을 확실히 알게 된 후에야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장 공백사태 발생…하반기 늘어날 듯=한국거래소는 김봉수 전 이사장이 물러난 뒤 3주째 대행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거래소는 원래 지난 3일 주주총회를 통해 새 이사장 선임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친박 국회의원 출신인 김영선 전 정무위원장의 이사장 내정설 논란 후 공모절차가 중단됐다. 김 전 이사장은 지난해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으나 '좀 더 기다리라'는 금융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임기를 연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관부처 수장인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1일 "직무대행이 잘하고 있지 않느냐"고 밝혀 인사가 장기간 미뤄질 가능성을 시사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지역난방공사는 정승일 전 사장이 5월31일자로 퇴임했으나 현재까지 사장 공모를 위한 임원추천위원회도 구성하지 못했다.

한국가스공사도 4월 사임한 주강수 전 사장의 후임 인선을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주주총회에서 후임을 정하려던 시도는 청와대의 지시로 백지화됐다.

원자력발전소 위조부품 파문과 관련해 물러난 김균섭 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의 후임 공모도 중단됐다.

한국은행은 김종화 금융결제원장 선임(4월)과 장세근 부총재보 퇴임(5월) 이후 부총재보 두 자리가 비어 있다. 김중수 한은 총재의 임원인사에 대해 청와대가 제동을 걸었던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김 총재는 6월 기자간담회에서 오는 8월 인사에서 임원인사와 직원인사를 동시에 하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수장 임명이 늦어지면서 임원진도 줄줄이 인사에서 밀리고 있다. 공공기관은 수장뿐 아니라 감사 등 임원도 청와대의 검증대상이기 때문이다.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이번주부터 청와대가 다시 인사 검증에 들어갔다는 설이 돌고 있다"면서 "도덕성 검증 등을 더 강화하려는 것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금융위 산하 기술보증기금의 조양환 감사, 자산관리공사의 배장웅 사외이사, 예탁결제원의 권오문 전무, 주택금융공사의 이해돈 상임이사, 신보의 김태환 감사와 권영택 전무인사도 2~6월 말에 임기가 끝났지만 후임자가 없어 계속 출근하고 있다.

이 밖에 임기 만료를 앞둔 공공기관들도 후임자 인선에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반기 수장 공백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내정자 임명 정지…내부 반발도=청와대는 퇴직관료의 자리 나눠먹기를 방지하기 위해 시스템부터 전면 개편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미 내정된 상태에서 기약 없이 인사가 지연되자 개점휴업 상태가 된 공공기관 내부에서는 불만이 흘러나온다. 안택수 이사장이 임기를 열흘 남짓 남겨둔 신용보증기금은 금융위 출신 관료가 내정됐다가 '청와대 지침'이라며 금융위가 중단시켰다. 이 때문에 수장 진공상태를 우려한 신보 임원추천위원회가 금융위에 활동재개를 요구하는 건의서 제출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황성호 전 사장이 물러난 지 1개월 가까이 됐음에도 후임 사장이 선임되지 못한 우리투자증권(우리금융 계열사)은 노조 차원에서 집단반발이 나오고 있다.

우리투자증권 노조는 내부 게시판에 "45년 역사상 초유의 사태"라며 "(정부가) 350만 고객이 100조원 넘는 자산을 예탁한 우리투자증권을 구멍가게 취급한다"고 비난했다.

노조는 "민간 증권사의 대표이사를 뽑는데 금융위는 대표이사 직무대행마저 금지해 도를 넘는 '관치금융'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되풀이되는 기관장 인선의 난맥상을 바로잡으려고 공기업 인사 시스템을 개선하기로 했지만 올해 상반기가 지나도록 구체적인 개선안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외부 인사를 포함해 다시 인선하라는 청와대의 지침도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관료들은 자신이 최고라는 뿌리 깊은 우월감이 있기 때문에 외부 인사를 포함해도 1순위ㆍ2순위로 구색을 맞추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라며 "외부 인사 중 우선 떠오르는 교수들은 현실을 잘 모른다는 한계에 부딪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다시 관료로 돌아올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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