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이나 구글과 같은 콘텐츠가 나오게 하려면 기초과학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오세정(61ㆍ사진)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은 서울경제신문 창간 53주년을 맞아 5일 대전 IBS 본원에서 가진 특별 인터뷰에서 "자금을 지원해줬으니 이를 관리한다는 방식으로는 기초과학의 성과를 낼 수 없다"며 "모험적인 연구를 과감히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창조경제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5월 출범한 IBS를 이끌고 있는 오 원장은 이날 인터뷰 내내 창조경제 성공의 열쇠가 기초과학 육성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의 기초과학 연구가 양적으로는 선진국 수준에 올라선 만큼 이제는 질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자들은 남이 하지 않는 도전적 과제를 많이 해야 하고 정부는 기초과학 연구개발(R&D) 전략을 관리에서 지원으로 바꿔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국제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은 지난 1981년 236건이던 것이 2010년 3만9,843건으로 169배나 늘었다. 같은 기간 연구논문 순위는 53위에서 11위로 올라섰다. 연구개발비도 2011년 450억달러로 세계 6위이며 이를 국내총생산(GDP) 대비로 보면 4.03%로 세계 2위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의 정부 R&D 예산의 연평균 증가율도 세계 2위다.
하지만 과학기술 연구의 질적 성장을 가늠할 때 쓰이는 논문의 국제 피인용 건수에서는 세계 30위권에 머물러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화학과 물리ㆍ생리의학 등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아직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는 같은 분야에서 16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보다 한참 뒤떨어진다. 대한민국 과학의 현실이 마치 몸집만 큰 아이와 같다는 게 과학계의 평가다.
때문에 우리가 과학강국으로 나아가가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초과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야 한다는 게 오 원장의 지적이다. 오 원장은 "그동안 경제발전 과정에서 상업 기술에 대한 수요가 많고 이를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최근 들어 기초과학이 약하면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또 기초과학 연구의 경우 뚜렷한 성과를 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긴 호흡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시행착오를 이해하고 인내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돼야 기초과학 연구도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오 원장은 기초과학 연구 결과를 성공적으로 사업화하고 있는 이스라엘 '바이츠만연구소'의 신약 개발 과정을 예로 들었다.
"바이츠만연구소가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한 신약의 경우 세계시장에서 매년 2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만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이 신약 개발 과정을 보면 1970년대에 연구가 이뤄졌고 1980년대 후속연구와 1990년대 임상실험을 거쳐 20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상용화가 이뤄졌습니다."
바이츠만연구소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초과학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인고(忍苦)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일단 사업화에 성공하면 경제적 파급 효과는 엄청나다. 이스라엘 최고의 생명과학 연구기관이자 세계 5대 기초과학 연구소로 꼽히는 바이츠만은 신약 개발 등의 특허에 따른 로열티 수입이 한 해 3조원을 넘는다.
오 원장은 "압축성장을 이끌었던 노동ㆍ자본의 요소투입형 시대는 저물고 있다"며 "국가 정책을 이야기할 때 기초과학은 시장가치가 명확하게 계산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애매모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할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오 원장은 이 같은 기초과학의 특성을 감안하면 정부 중심의 압축성장 시대 R&D 투자 패턴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초연구가 단기ㆍ중기ㆍ장기의 기간별 과제로 나뉘어 이뤄지는 균형 잡힌 투자 패러다임이 형성돼야 기업의 투자도 늘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정치권과 지역에서 논란이 일었던 정부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수정안에 대해 묻자 오 원장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오 원장은 과학벨트 거점지구 핵심시설인 IBS를 대전 엑스포과학공원에 입주시키는 내용의 수정안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고 했다.
"과거 몇 명의 연구원들이 자기네들끼리만 모여 연구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연구단지가 도심에 들어서는 게 세계적 추세죠. 엑스포공원 인근에는 여러 연구소가 자리를 잡고 있어 여러 연구자들이 쉽게 모여 협업이 가능하고 정주여건 역시 기존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어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원장은 독일 베를린 '아들러스호프' 연구단지가 단지와 도시계획을 잘 접목해 유럽의 대표적 클러스터로 성장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이곳에는 훔볼트대학을 포함해 과학기술대학 6개와 연구기관 10개, 중소ㆍ벤처기업 950여개가 입주해 과학과 비즈니스가 융합을 이루고 있다. 영국 런던의 프랜시스크릭연구소와 미국 코넬대 뉴욕시 캠퍼스, 미국 메릴랜드 존스홉킨스 사이언스-테크놀로지파크 등도 도심에 건설되고 있는 대표적 '사이언스 파트'의 사례다.
오 원장은 대전 신동지구에 건립될 중이온가속기가 우리 과학 도약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80년대 이후 노벨상 수상자 중 약 20%가 가속기를 활용한 연구자이며 가속기가 다양한 연구에 활용이 가능한 첨단장비라는 이유에서다. 기초과학연구용인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은 400×700m에 이르는 대형 연구시설로 세계 최초로 원형가속기와 선형가속기가 결합된 형태로 건설될 예정이다.
산학 협력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지적에 대해 오 원장은 교류의 부재를 근본 원인으로 꼽았다.
"선진국은 연구자로 있다가 기업에 가고 기업에 있다가도 다시 연구자로 돌아오고 하는 등 인적 교류가 매우 활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 대학 교수가 되면 계속 연구만 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적어도 공대 교수라고 하면 현장 경험도 필요한데 말입니다."
오 원장은 "같은 연구라 하더라도 학교와 기업의 연구시스템은 다르다"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산학 협력도 잘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공계 기피현상 해소를 위해 연구자 처우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에 오 원장은 "처우가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정부 출연연 연구자들이 해외 연구기관이나 대학으로 옮겨가는 것은 우리 과학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며 "출연연 비정규직 비율이 70%를 넘는데 연구자들의 고용이 안정돼 경제적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오 원장은 기초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 전망과 관련해 "최근 우리 연구자들의 우수한 성과가 과학저널의 표지 논문을 장식하고 있어 고무적"이라며 "앞으로 10년 정도면 노벨상 수상의 꿈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용창출 효과 큰 바이오·헬스케어 분야 집중 ■ IBS 연구방향은 "기초과학은 길게 봐야 합니다. 국가 장기비전에 맞는 바이오와 헬스케어 등 생명의학 분야 연구를 크게 키울 계획입니다."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최근까지 3차에 걸쳐 세계적 석학 19명을 연구단장으로 하는 기초과학 드림팀을 꾸려 나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IBS는 최종적으로 수학ㆍ물리학ㆍ생명ㆍ화학 등 50개 기초연구 분야의 세계 최고 연구자들을 초빙해 연구단을 맡기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무엇보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의 핵심 기관이며 연구단별로 앞으로 10년간 연간 최대 100억원을 파격적으로 지원한다는 점에서 과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의 단기 성과 위주에서 벗어나 연구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 장기적으로 기초과학 연구 분야의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IBS의 중점 연구 분야에 대해 오 원장은 "일반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산업의 경제 파급 효과가 엄청나고 특히 헬스 서비스 분야는 고용창출 유발효과가 상당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조업에서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손을 쓰는 일이 줄어든다는 의미"라며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방향으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서비스 산업 연구가 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원장은 이어 "올해 4차 연구단장을 선정할 계획"이라며 "인류에 공헌할 수 있고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6명 정도의 연구단장을 정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IBS의 연구단 구성과 관련해 오 원장은 "2017년까지 50개 연구단 구성이 완료되면 전체 상주인력은 3,000여명에 이르고 예산은 7,000억원 정도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948년에 설립돼 지난해 기준 2만1,400명의 연구원과 연간 18억유로(약 2조6,000억원)의 예산을 사용하고 있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나 1917년 출범 이후 3,400여명 인력, 930억엔(약 1조200억원)의 일본 리켄(RIKENㆍ이화학연구소)연구소 등과 비교해 비록 우리의 기초과학 연구의 현실과 여건이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연구 역량을 쌓아갈 수 있는 토대만 마련되면 비약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게 오 원장의 생각이다. ◇약력 ▲1953년 서울 ▲1971년 경기고 졸업 ▲1975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1982년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 이학 박사 ▲1984년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물리ㆍ천문학부 교수 ▲1999년 과학기술부ㆍ과학재단 지정 우수연구센터 복합다체계물성연구센터 소장 ▲2000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2004년 교육부 2단계 BK21 사업기획단 위원장 ▲2007년 한국과학재단 이사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 '세계적 연구중심대학' 사업 총괄관리위원장 ▲2011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2011년~ 기초과학연구원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