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수필] 격정의 계절

우리나라 일도 아닌 일본의 일이며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기이한 것은 2,000엔권 발행을 에워싼 일본의 찬반논쟁이 의외로 시들하다는 점이다. 입에 거품을 물며 찬성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핏대를 세우며 반대하는 사람도 없다.만약 우리 정부가 느닷없이 2만원권 새 지폐를 발행하겠다고 결정한다면 어찌될까.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것이다. 찬반의 입장을 가진 사람이 모두 나서서 삿대질을 벌일 것이다. 정부가 하자는 일에 뭇사람이 나서서 일일이 시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기어이 흑백을 가려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런 격정(激情)엔 정부와 민간· 여와 야· 이해당사자와 제3자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 일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삿대질이 벌어지며 분별과 절제없이 「우리의 입장」「우리의 주장」이 난무한다. 그런 시비를 일일이 경청하다보면 이 세상에 제대로 되고 있는 일은 하나도 없으며 악(惡)의 독기 때문에 마치 종말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듯한 두려움에 빠진다. 파리를 잡는 도끼질 그리고 결사항쟁의 함성 사이에 끼어 몸둘 바를 모르게 된다. 좋은 게 좋다면서 매사에 끊고 맺음없이 적당히 대처하는 일,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우유부단함, 그리고 공사(公事)를 남의 일 쳐다보듯이 하는 무관심도 결코 칭찬받을 태도는 아니다. 그러나 내일은 제쳐두고 공사에만 덤벼드는 태도도 칭찬받을 짓은 못 된다. 세상엔 흑백을 가릴 수 없는 일, 더 뜸을 들여 천천히 그리고 현명하게 흑백을 가려야 할 일이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점 흑백을 가림에 있어 더 조급해지고 있다. 또 갈수록 더한 격정에 사로잡히고 있다. 정태성언론인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