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3월 테인 세인 대통령이 이끄는 민간정부의 출범 이후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미얀마에 대한 관심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거의 매일같이 언론매체에서 '미얀마'라는 세 글자를 만나고 미얀마에 관한 영상을 접하는 것이 이 지역 전문가로서 느끼는 행복이다. 사실 이렇게 급격하게 미얀마가 개방이 될 줄 짐작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시아에서 미얀마처럼 천연자원을 보유하고도 외부와 담을 쌓고 있었던 국가도 없었으니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식민지ㆍ군부 지배 끝내고 민주화
대략 10세기부터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됐던 1886년 이전까지 이 지역은 다수 종족인 버마족에 의한 전통적 왕조시대의 역사가 전개됐다. 교역에 따른 접촉에 의해 이웃 인도의 문명세계가 크게 영향을 미쳐 상좌불교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은 곳이며 그래서 동글동글한 미얀마 문자나 특이한 숫자도 모두 인도 문명의 흔적이다. 불교적 신앙심이 깊은 미얀마에는 동남아에서 가장 많은 수의 불교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영국의 식민지 지배로 미얀마는 유럽의 영향도 짙은 곳이다. 미얀마의 최대 도시이자 옛 수도인 양곤의 거리에서 식민지풍의 영국식 건물을 보는 것도 이곳 관광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한때 '버마'인지 '미얀마'인지 국명에 대한 논란이 일어난 데에는 식민지 지배가 한몫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35개가 넘는 복잡한 민족을 규합하는 연방 구성의 실험은 그 중심의 핵심 세력이었던 아웅산 장군의 암살로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우여곡절 끝에 1948년 1월에 독립을 선포한 미얀마는 정치적 기반이 허약했던 초대 수상 우누의 실정 끝에 소수민족 반군단체와의 내전에 돌입했다. 국가 분열의 빌미로 군부의 수장 네 윈이 1962년 쿠데타를 일으켜 통치 형태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반세기 이상 동안 군부가 미얀마를 지배했고 모든 것이 정체돼버렸다. 그런 군부가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물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꾸미긴 했지만 신헌법을 제정하고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했다.
그런 정치적 결단이 급속도로 이뤄진 탓에 그 과정을 돌이켜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청렴하다고 여겨지는 테인 세인 대통령 정부의 변화 시도 또한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다. 아웅 산 수 치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와 국회의원 당선, 정치범의 무조건적인 석방, 외국인투자법의 과히 공격적인 개정, 노동조합법을 비롯한 노동 관련법 및 인권법의 제정, 언론 통제의 해제 등 개혁의 속도는 포뮬러원(F1) 자동차 경주대회의 그것과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미얀마 공식방문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동행과 존중 관점서 협력 강화해야
해외 무역에 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서는 당연히 미얀마 같은 자본주의에 노출되지 않은 국가가 진정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자본과 기술이 있다고 무조건 진출하고 보자는 식은 곤란하다. 미얀마를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국민이 이질적인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돼 있고 향후 갈등의 양상이 심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일단 전체보다는 개인적인 관계와 신뢰에 중점을 둬야 한다. 인프라가 부족한 점도 진출에 장애가 된다. 미얀마의 경우 워낙 자원이 많아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국제사회의 투자가 이뤄지면 금방 해결될 문제이기는 하다. 길거리에서 중고책을 파는 곳이 많고 뭔가를 읽고 있는 미얀마인들의 모습을 보고도 낙후된 경제와 낮은 소득 같은 경제적 수치로 가볍게 판단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동행과 존중의 관점에서 시작한다면 한류의 인기로 이미지 좋은 한국이 미얀마와 협력할 수 있는 길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