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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와 가족.' 아산 정주영이 평생 핵심으로 지켰던 가치다. 부친의 가르침대로 '장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회사가 도산 위기를 맞아도 해외유학 중인 동생들의 학비는 꼬박꼬박 보냈다. 물론 아우들도 현대가 뿌리내리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일본 유학까지 마친 바로 아래 동생 인영의 존재는 특히 큰 힘이었다. 정인영이 통역을 맡은 덕에 아산은 미군이 발주하는 공사를 따내며 기반을 닦았다. 아산은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앞두고 누구보다 아꼈던 아우 인영을 내보냈다. 꼼꼼한 성격의 정인영이 대규모 해외 공사는 무리하고 반대하자 내치면서까지 뛰어든 해외 건설은 현대는 물론 한국의 일취월장을 이끌었다. 당면 현안이 1차 석유위기에 따른 경제난국과 외환보유액 고갈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 1970년대 건설 한국의 정점을 찍은 공사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발주한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 '세계 8대 불가사의에 포함해야 한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규모가 크고 난공사인 주베일 항만 공사 입찰과 시공·완공까지의 과정은 아직도 전설처럼 살아 숨 쉰다.
1975년 7월. 현대건설에 극비정보가 날아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10억달러 규모의 항만 공사를 발주할 것이라는 정보였다. 확인해보니 사실. 훗날 20세기 최대 역사로 불린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관련한 정보를 보고받았을 때의 감정을 훗날 아산은 이렇게 회고했다. '피가 끓었다.'
문제는 낙찰의 고지가 절벽처럼 험난했다는 점. 선진국 건설업체들이 몇년 전부터 입찰을 준비해온 상황에서 경쟁에 뛰어들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모두 회의적인 가운데 아산만 결코 늦지 않았다는 판단 아래 출사표를 던졌다. 현대건설은 어렵사리 마지막 열 번째 입찰업체에 선정됐디. 마지막 관건은 입찰가. 얼마를 써넣을지에 성패가 갈리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아산의 처음 예정금액은 15억달러. 하지만 입찰 경쟁이 거세지며 12억달러, 9억달러로 낮췄다. 아산은 최종적으로 8억7,000만달러라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입찰일인 1976년 2월16일.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9억444만달러를 써낸 미국 업체가 수주한 것. 낙찰업무를 담당했던 현대건설의 중역이 9억달러 이하면 너무 싸다는 생각에 실패하면 걸프만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9억3,114만달러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하얗게 질렸을 때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미국 업체의 입찰금액이 일부 공사에 한정됐다는 점이 밝혀지며 차액을 써낸 현대건설이 공사를 최종적으로 따냈다. 공기단축 약속도 사우디 측의 마음을 움직였다. 우여곡절 끝에 들어오게 된 9억3,114만달러는 당시 우리나라 예산의 4분의1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금액. 세계 건설산업의 변방인 한국이 선진국 업체들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공사를 따낸 쾌거였다.
처음 맡은 초대형 해외 공사는 어려움도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작업현장과 한국과의 거리. 하지만 자재를 현지에서 조달하면 공사비가 불어날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아산의 결단이 빛을 발한다. 모든 자재를 국내에서 조달하기로 한 것이다. 공사에 쓰일 자재와 구조물을 울산조선소에서 만들어 바지선으로 사우디까지 끌고 오는 방식이다. 결국 현대건설은 1만마력짜리 터그보트 3척과 2만톤 바지선 3척, 5만톤 바지선 3척으로 1만2,000㎞ 바닷길을 19차례나 오가며 해상 수송작전을 안전하게 마쳤다. 천우신조로 험한 태평양과 인도양을 오가는 뱃길에서 단 한번도 태풍이나 해난을 만나지 않았다.
주베일 산업항만 공사를 통해 아산은 본격적으로 '중동 건설신화'를 써나갔다. 마침 국내 경제에 불어닥친 제2차 석유파동을 극복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사실 정주영이 아우를 내치면서까지 중동 진출을 결심한 계기는 1973년의 제1차 석유파동이었다. 석유파동으로 현대건설의 자금사정이 악화되자 정주영은 중역회의에서 이렇게 밝혔다. "돌파구는 중동이다. 오일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중동으로 가야 한다."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1975년 이란의 반다르 압바스 조선소 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중동에 진출한 현대건설은 불과 3개월 뒤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 중동 건설 열풍을 일으켰다.
아산이 건설업에 처음 뛰어든 것은 1947년 5월 현대건설의 전신인 현대토건사를 창업하면서부터다. 이어 1950년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창립하면서 본격적인 건설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미8군 공사를 따내며 사업기반을 다져나갔고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 복구 공사,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 등을 잇따라 수주하며 국내 5대 건설업체로 자리를 굳혔다. 오늘날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경기 침체와 국제유가 하락 등 악재 속에서도 연결 기준 17조3,870억원의 매출과 9,589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국내 최대 건설업체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아산의 건설 신화에는 창조 에너지가 녹아 있다.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창의적 발상이 번뜩인다. 아산은 줄곧 "아무 생각 없이 60년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은 보통 사람의 10배, 100배의 일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대표적 사례가 서산간척지 물막이 공사에 도입한 '유조선 공법'. 현대건설은 1978년 정부의 매립 허가를 받아 서산간척지 공사를 시작했는데 관건은 매립.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산 앞바다에서 방조제 물막이를 위해 20톤 이상의 돌을 구해 매립하는 것이었다. 이에 정주영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머리는 그냥 붙어 있는 게 아니야. 이럴 때 쓰라고 붙어 있는 거지. 거 왜 고철로 팔아먹으려고 사온 유조선 있지. 그걸 당장 서산 앞바다로 끌고 와." 결국 1984년 정주영의 지휘 아래 철야로 진행된 작업에서 길이 332m의 폐유조선을 방조제 쪽으로 밀어 넣어 물막이 공사를 끝내게 된다. 이를 통해 현대건설은 당초 계획했던 공기 45개월을 36개월이나 줄여 9개월 만에 공사를 끝냈고 290억원의 공사비도 절감했다. 뉴스위크·타임 등 외신들은 이 유조선 공법을 소개하며 '정주영 공법'으로 명명했다.
1970년대 남산 밑에 전국경제인연합회 빌딩을 지을 때의 일화도 유명하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던 정주영은 빌딩을 20층으로 설계했는데 남산 중턱에 위치한 고사포대의 사계를 가린다는 이유로 건축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때 정주영의 역발상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정주영은 빌딩 부지를 옮기자는 담당 중역의 말에 혀를 차며 말했다. "참 한심한 사람이군. 포대 사계를 가려 건물을 못 짓는다면 그 포대를 20층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옮기면 될 것 아닌가." 이후 현대건설은 포대를 더 높은 위치로 옮겨줬고 군부대의 동의로 전경련 빌딩은 정주영의 장담대로 남산 밑에 20층으로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