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운동으로 단련한 우직함과 대학서 배운 논리적 의사결정 방법이
조 단위 빅딜 성사시키는데 큰 도움
오랫동안 외국계 IB서 쌓은 역량… 한국 자본시장 발전에 쓰고 싶어
안성은(사진) 도이치은행그룹 한국대표는 투자은행(IB) 업계에 20년간 몸담고 있는 소위 '꾼'이다. 그동안 한국 경제사의 큰 변환점에서 의미 있는 수많은 딜을 자문했고 업계에서는 국내 1세대 투자은행가인 윤경희 맥쿼리그룹 고문에 이어 2세대 투자은행가로서 명성이 높다. 현재는 이천기 크레디트스위스 한국대표, 임석정 JP모간 한국대표와 더불어 10년 이상 외국계 대표직을 수행하고 있는 IB 업계의 3대 핵심 인사로 꼽히고 있다. 그런 안 대표도 IB를 한마디로 정의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전히 난감해한다. 안 대표는 "자식들이 어릴 때 아버지가 하는 일이 뭐냐고 묻고는 했는데 '기업이 자금조달을 할 때 도와주는 일'이라고 설명하면 어려운지 더 묻지도 않았다"며 "간단하게 정의 내리기도 어렵고 이야기를 한다면 끝도 없는 게 IB"라고 말했다.
IB는 우리 경제생활 곳곳에 생각보다 더 스며들어 있다. 회식자리에서 자주 찾는 '카스'의 제조사 OB맥주가 세계 최대 맥주회사(안호이저부시인베브)에 팔린 일, 소셜커머스 업체 티켓몬스터의 새로운 주인을 찾는 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큰딸 정성이 고문이 최대주주로 있는 광고회사 이노션의 상장을 돕는 일을 한다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다. IB 업무는 우리가 생활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알고 부딪히는 모든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거나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수단으로는 상장(IPO), 주식 발행, 채권 발행, 인수합병(M&A) 등 다양한 전략을 활용한다.
하이닉스 정상화 과정, 현대건설·대우인터내셔널·대한통운 매각 등 국내 M&A 시장에서 조 단위가 넘는 이정표 같은 딜을 수행했던 그가 29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꿈 많고 끼 넘쳤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어릴 적 꿈은 투자은행가와는 동떨어진 국가대표 운동선수였다. 안 대표는 "어린 시절 우직하고 집중력이 높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훈련하면 성과를 낼 수 있는 운동에서 어릴 때 두각을 드러냈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때는 수영과 스케이팅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서울시 빙상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중학교 때는 체력장에서 모의수류탄 던지기를 했는데 학교 담장 밖으로 수류탄이 날아가면서 던지기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프로야구 2군 입단 테스트를 통과할 정도로 야구에 몰입했던 시기도 있었다. 어릴 적 꿈을 통해 그의 현재를 돌아보면 IB 업계도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스포츠 경기처럼, 평소 반복적으로 우직하게 연습해야 하는 스포츠 훈련처럼 다가온다.
스포츠에서만 끼가 넘쳤던 것은 아니었다. 공부도 잘했다. 금융 쪽에 관심이 많지 않았던 학창시절, 그는 이과를 선택했고 서울대 공과대학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기술적 분석을 통한 의사결정 과정에 관심이 많았다. 생산관리·인간공학·경영과학으로 나뉘어 있던 산업공학과에서 주전공으로 경영과학을 택했다. 안 대표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던 아이가 공과대학에 입학해 금융산업의 최첨단을 달리는 IB 업계에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면서도 "스포츠에서 단련한 우직함과 대학에서 배운 논리적 의사결정 방법이 IB 업계에서 일하면서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소개했다.
안 대표는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로체스터대에서 경영학석사(MBA)를 취득했다. 이후 한화그룹 경영기획실에서 일하다가 계열 증권사로 자리를 옮겼고 영국 BZW(바클레이스의 전신)에서 IB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IB 업계에 입문하던 시기에 그가 잡은 첫 번째 끈은 맥쿼리그룹의 윤 고문이다. 윤 고문은 업계 입문 17년 만에 영국계 투자은행 베어링브러더스 한국대표로 영입되며 한국인 최초로 외국계 IB의 수장자리를 꿰찬 인물이다. 안 대표는 "베어링브러더스에서 같이 일하면서 뱅커로서의 철학에 대해 많이 교류했다"며 "고객 우선주의와 자기관리라는 현재 업무 철학을 만들어준 분"이라고 말했다.
지금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끈은 직원들이다. 멘토였던 윤 고문과 이어진 끈이 직원들과의 끈으로 연결될 수 있는 매듭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의미다. 안 대표는 "직접 일하는 것보다 직원들이 씩씩하게 일을 더 잘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직원들과의 교류를 지금보다 늘려갈 것"이라며 "윤 고문이 이야기한 것 중에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직원들에게도 강조하는데 그것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직원들이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 부정적으로 결정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의 건강과 휴식에 관대하고 윤리적인 마인드를 상당히 강조한다.
그는 외국계 IB 대표 중 가장 많이 이직한 특이한 이력도 있다. BZW에서 IB 업무를 시작한 후 윤 고문의 영입제안을 받아 영국계 IB인 베어링브러더스(현 ING베어링)로 자리를 옮겨 7년간을 일하고 미국계인 살로먼스미스바니에서 IB 대표가 됐다. 2002년 도이치증권 한국IB 대표로, 2004년에는 메릴린치 서울지점의 IB 대표로 둥지를 옮겼다. 2008년에는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 한국대표 자리를 맡았고 2013년 다시 도이치은행그룹 한국대표로 10년 만에 도이치로 돌아왔다.
안 대표는 "금융업종은 충성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충성의 대상은 회사가 아닌 고객과 자기 직업"이라며 "개인적으로도 도전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돼 있고 회사를 옮기면 스스로 동기부여가 돼 결국에는 고객들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산업 자체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둥지는 자주 옮길지언정 맡겨진 일은 끝까지 책임진다. 고객 중심주의라는 큰 틀에서 많은 업무를 훌륭히 해내기 위해서는 여건이 더 좋은 회사로 옮기는 것도 불사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하이닉스 딜을 10년 동안 담당한 것이다. 현대반도체와 LG반도체가 국가적인 구조조정으로 합병해 탄생한 하이닉스는 당시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자금사정이 어려워진 하이닉스가 처음으로 12억5,000만달러의 해외자금을 유치하던 2001년 5월 안 대표는 갑작스레 딜을 맡았다. 그는 미국계 IB인 살로먼스미스바니에 있던 중 수장이 다른 금융회사로 이직하는 바람에 최종 책임자가 됐다. 안 대표는 "시장 상황이 어려웠고 갑작스럽게 수장 역할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 마무리했다"며 "2012년 SK로 주인을 찾기까지 하이닉스는 저를 믿고 업무를 맡겨줬고 고객의 딜을 가장 잘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그동안 회사를 많이 옮겨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도이치의 색깔이 뭐냐는 질문에는 흰색이라고 답했다. 안 대표는 "이제 증권 업계도 마찬가지지만 IB 업계 역시 일반 범용 상품으로 고객들에게 서비스하는 게 어려워질 것"이라며 "경쟁 외국계 IB보다 젊은 조직인 우리는 고객들에게 적확한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고객 저마다의 색깔을 입히기 위해 흰색의 도화지를 자처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그동안 외국계에서 배운 역량을 한국 자본시장을 위해 쓰고 싶다며 은근히 속마음을 내비쳤다. 안 대표는 "외국계 금융회사에 근무하다 보면 개인·직원·국민이라는 세 가지 역할이 이해 상충할 때가 있다"며 "정답은 없지만 외국계 업체가 한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딜을 제안해올 때 거절하거나 국민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외국계 한국대표들이 많이 고민하는 부분일 텐데 기회가 된다면 업계를 떠나기 전에 물질적인 부분을 떠나 그동안 외국계에서 축적된 경험과 역량을 국내사에서 공헌할 수 있는 부분도 고민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안성은 대표는 △1961년 서울 △서울대 산업공학과 학사 △미국 로체스터대 경영학석사(MBA) △1990년 한화그룹 근무 △1993년 BZW 근무 △1996년 ING베어링스 IB 상무 △2000년 살로먼스미스바니 한국 IB대표 △2002년 도이치증권 한국 IB대표 △2004년 메릴린치 한국 IB대표 △2008년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 한국대표 △2013년 도이치은행그룹 한국대표 |
"올 IB시장 커지겠지만 외화내빈 될 수도" 지배구조 재편 때 회사 상황 고려 "대기업들의 사업구조와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투자은행(IB) 업계가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해야 실질적인 수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안성은 도이치은행그룹 한국대표는 올해 대기업들의 자발적인 사업구조 재편이 활발해짐에 따라 IB 업계가 겉으로는 화려할 수 있지만 실제 속을 들여다보면 텅 비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안 대표는 "삼성과 한화의 빅딜에서도 볼 수 있듯 대기업들의 사업구조 개편 과정은 보안이 가장 중요하다"며 "딜의 당사자들끼리 모든 것을 결정하고 사후적으로 IB가 검증만 하는 역할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IB 업계에서 보면 기업들의 필사적인 생존경쟁 속에서 이들의 속내를 읽어내는 뱅커만이 과실을 따먹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안 대표는 "최종 계약서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법무법인과 감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계법인은 딜의 규모와 수가 늘어나는 대로 성과가 발생하지만 IB는 특성상 딜 사이즈가 크고 가시적인 것만 맡아서 하고 보수도 성공 베이스로 받기 때문에 성과가 절반에도 못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IB는 지배구조 재편 과정에서 회사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안 대표는 "기업별 맞춤 솔루션을 통해 IB들 스스로가 기업들의 사업구조 재편 과정에서 역할을 찾아내야 한다"며 "여러 가지 소재를 버무려 딜로 승화시킬 수 있는 독자적 역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 대표는 올해 국내 기관투자가의 해외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이제 국내 시장은 기관투자가들이 목표로 하는 수익률을 내기 어려운 환경이 되고 있다"며 "국내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이 해외기업에 투자하는 자금이 늘어나고 거꾸로 해외 재무적 투자자(FI)들의 국내 기업 투자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어 "국내와 해외 기업들의 인수합병(M&A) 시도도 늘어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는 기술력과 브랜드를 얻기 위한 거래가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안 대표는 "국내 기업들이 해외 기업 인수에 관심을 두는 것은 그 회사가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기술력과 브랜드를 얻기 위한 측면이 크다"며 "오히려 불황을 겪고 있는 산업은 매수자 입장에서 저렴한 가격에 회사를 인수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부진한 산업에서의 기술력과 브랜드 확보 전쟁이 올해 IB 시장의 테마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도이치증권은 이러한 시장 환경에 맞춰 올해는 양보다 질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안 대표는 "올해는 딜을 적게 수임하더라도 고객에게 가장 좋은 솔루션을 찾아주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라며 "기업들의 니즈를 파악해 내실을 기하는 시기로 삼겠다"고 설명했다. 도이치증권은 지난 2013년 안 대표를 영입한 뒤 지난해 곧바로 성과가 나타났다. 블룸버그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도이치는 2013년 M&A자문 부문에서 13위, 시장점유율 1.2%를 기록했지만 지난해에는 3위로 뛰어올랐고 시장점유율도 11%로 크게 증가했다. 도이치는 지난해 KB금융의 우리파이낸셜 인수를 마무리 지었다. ADT캡스 인수전에서도 미국계 투자회사 칼라일의 인수자문을 맡아 어피니티·KKR 등 유력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성공적으로 딜을 끝내는 등 안 대표 효과로 크게 약진한 한 해였다. |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