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은 경제흐름의 혈맥이다. 국가ㆍ기업ㆍ가계로 구성되는 경제주체들 사이에 부가가치를 전달함과 동시에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금융에 주어진 기본 역할이다. 그래서 금융이 제대로 돌아가면 갈수록 경제의 역동성이 높아지고 규모도 커진다. 반대로 혈맥이 막힌다면 시장을 지탱하는 질서도 함께 무너진다. 금융의 줄기를 담당하는 것이 바로 은행이다. 은행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다.
◇'비 올 때 우산을 빼앗는다'는 오명부터 버려야=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다가온 '퇴출'의 경험은 은행들에 너무 아팠다. 그래서인지 티끌만큼의 위험 앞에 서면 무서울 정도로 싸늘해진다. 은행으로부터 여신회수 압박에 시달렸던 한 중소기업 사장은 "하루아침에 태도가 돌변하더라. 자기들 생존이 먼저라는 논리 앞에서는 제아무리 매달려도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국내 은행들은 최근 빚어진 가계대출 중단 소동 이전에 중소기업들에 대해서도 사실상 대출을 전면 중단했던 적이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친 지난 2008년 직후다. 불확실한 세계경제 때문에 중소기업에 돈을 빌려주면 떼일 가능성이 높았던 기업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자금난을 겪었던 기업들에 대해서도 공격적으로 여신을 회수했다. 기업들은 "비 올 때 우산을 빼앗는 게 은행이냐"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은행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돈을 조달하기 어려운 부류에도 은행은 야박하다. 2003년 말 신용등급 10등급의 신규대출 건수는 34만건. 1등급에 대한 대출건수가 12만건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저신용자의 대출 규모가 무려 세 배나 많다. 그 뒤 상황은 바뀌기 시작한다. 저신용자의 대출은 옥죄고 대출은 신용도가 좋은 쪽으로만 쏠렸다. 급기야 최근에는 10등급 대출이 한 해 2만건으로 90%나 줄었다. 물론 새희망홀씨대출 등 사회취약계층을 위한 대출상품은 내놓았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은행의 자발적 노력이라기보다는 정부 당국의 정책적 압박이 작용한 결과다.
◇고객 위한 은행 아니라면 존재 이유 없어=대부분의 국가에서 은행업은 어떤 산업보다 규제가 많다. 대신 진입장벽이 높은데다 예대마진이라는 안전판이 형성돼 있어 안정적인 수익성을 보장받는다. 국민을 위한 기관이기 때문에 규제와 수익 보장을 동시에 받는 것.
전문가들은 여기부터 은행의 기본이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은행산업의 중심을 바로 고객인 국민과 기업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현재의 은행권은 고리대금업자와 차별성을 가지는 대목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한 자금담당 임원도 "돈이 떼일 상황인데도 돈을 빌려주라는 것이 아니라 보다 면밀하게 재정 상황을 살펴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면서 "산업자본이 힘을 키우는 것은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에 실망한 경험 때문이지 않겠냐"고 꼬집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뼈대인 산업이 혈맥인 금융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갈수도 있다는 섬뜩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만큼 자금중계와 원활한 자금흐름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이라는 금융에 주어진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