換亂책임자가 없다 ?

재판부는 공소사실 가운데 환란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진도와 해태그룹에 협조융자를 해주도록 채권단에 압력을 행사한 부분(직권남용)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무죄판결 이유로서 『피고인들이 국제통화기금(IMF)행을 조속히 결정하지 못한 점을 탓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외환사정을 의식적으로 축소, 은폐 보고했다는 증거나 고의성을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정책판단 잘못을 이유로 형사처벌을 내릴 수 없다는 판시(判示)다. 이번 판결로 환란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없어진 셈이다. IMF사태로 전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판국인데 이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이 없다니, 공직자의 윤리를 묻고 싶다. 이번 판결은 환란책임과 관련된 모든 쟁점에 대해 검찰의 논거(論據)를 배척하고 피고인측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인 것이 특징이다. 변호인단이 내세운 「죄형법정주의의 안정성 보호」라는 명분이 검찰의 논리를 압도해 나간 것이다. 결국 정책 책임자의 판단에 대해서는 법률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사법부의 잣대 적용이다. 사실상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적·도덕적 책임과 법률적 책임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법적인 책임을 떠나서라도 국가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두사람이 외환관리의 초기 대응에 실기(失機)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봐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어쨌든 정책판단에 잘못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책임을 두사람에게만 돌리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대통령을 비롯, 정치권·기업·노동계 등이 모두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전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환란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번 1심판결이 공직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계기가 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공직자의 윤리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권한에 비례한만큼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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