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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전자는 지난 8월 세계 최초로 3차원 수직구조 낸드플래시(V낸드) 양산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데이터를 저장하는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의 미세화 경쟁에 종지부를 찍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간 반도체 업계는 칩의 크기를 줄이는 미세화 경쟁에 치중했지만 크기가 작아질수록 데이터 간 간섭현상이 발생하는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기존 단층형태였던 셀을 아파트처럼 수직으로 쌓아올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경쟁업체와의 기술격차도 1~2년 정도로 벌려 당분간 이 시장에서 독주체제를 굳혔다.
#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업계는 올 들어 전세계에서 발주된 드릴십 12척을 모두 싹쓸이 수주했다. 드릴십은 척당 가격이 5억~6억달러에 이르는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선박이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일반상선 수주가 급감한 상황에서도 국내 조선업계가 승승장구하는 것은 일찌감치 드릴십 등 고부가 선박으로 눈을 돌려 관련 기술력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례는 국내 기업들이 혁신적인 기술력을 통해 산업의 경쟁구도는 물론 기업 생태계마저 변화시킨 경우들이다. 특히 위의 사례에서 보듯 혁신기술의 파급효과는 지금과 같은 불황기일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미 우리 기업들은 여러 분야에서 과거 선두였던 선진국 기업들을 끌어내리고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소니 등 일본 전자업체가 액정표시장치(LCD) TV 시대의 개막을 이끌었다면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기업들은 차세대 TV로 불리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분야에서 일본을 압도하는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다. 또 현대·기아차는 품질경쟁력을 앞세워 세계 5위의 자동차업체로 성장했고 포스코는 2010년 이후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사'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우리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지적이다. 신기술의 개발주기가 짧아지고 글로벌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기술경쟁에서 도태된 기업은 자칫 한순간에 시장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하기 때문이다. 한때 휴대폰시장의 절대 강자였다가 스마트폰 흐름에서 뒤처지며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에 인수된 핀란드 노키아의 경우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국내 경제로 눈을 돌리면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 하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주요 기관들은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을 4% 안팎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중장기적으로 2~3%대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 같은 잠재성장률 하락은 우리 주력 산업의 성장 정체현상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전자·자동차·석유화학·철강·조선 등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들은 이제 성숙기에 접어들어 예전과 같은 가파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글로벌 경기침체가 이어지며 전세계 소비자들은 웬만하면 지갑 열기를 꺼리고 있어 시장공략마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 등 신흥국들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국내 기업들을 맹추격하고 있다. 120개 전략기술 분야에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기술격차는 2010년 2.5년에서 지난해 1.9년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최근 중국 탐사위성의 달 착륙 성공에서 확인됐듯 중국은 우주발사체 개발기술과 미래형 유인항공 기술 등에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해답은 '기술'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가 현재의 주력 산업 분야에서 세계적 강자로 발돋움한 것은 선진국의 제품과 기술을 빠르게 모방하는 '추격자'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국내 기업들은 해외 경쟁기업들의 제품과 기술을 파악한 뒤 전략적인 목표를 선택하고 전사적 역량을 집중, 기술격차를 단숨에 해소하는 방법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선두권에 올라선 지금, 과거의 '추격자' 전략은 용도 폐기된 지 오래다. 이제 중국 등 후발주자의 추격을 뿌리치려면 기술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경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이제는 우리 기업이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혁신자가 돼 있는 만큼 벤치마킹을 통해 모방할 상대가 크게 줄어들었고 설령 선진국에서 새로운 기술 및 제품이 나오더라도 중국 기업이 따라 하는 속도가 워낙 빨라 상대가 안 된다"며 "따라서 우리 기업 고유의 강점과 결합한 신기술 개발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국내 기업들은 신기술 개발을 통해 기존 주력 산업을 대체할 차세대 주력 산업을 키워나가는 데 역량을 모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은 "저성장의 고비를 극복하고 주력 산업의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한 신기술 개발로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세계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면서 "특히 신재생에너지 등 에너지 관련 기술과 미래형 자동차 기술 등을 적극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