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기자의 一日一識] <59> 판타지는 싫다, 진짜 같은 드라마가 좋다

검사들의 이야기로 주목을 끌고 있는 SBS 월화드라마 ‘펀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벌어지는 부조리한 현실을 그려내면서, 사회의 숨겨진 일단면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진제공=SBS

과거 드라마 속 ‘실장님’들은 멋지고 부유한 젊은 남성을 가리키는 대명사였습니다. 미인이지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여주인공과 그녀를 배려하는 재벌 후계자 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는 ‘뻔하다’고 욕을 먹으면서도 여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른바 신데렐라 스토리인 것이죠. 그런데 실장님이나 본부장님을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에 대중들이 식상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유명 작가들도 자신들의 상상력에 기반해서 극본을 쓰기보다는 특정 분야나 산업을 전문적으로 취재하고 현장의 맥락을 생생히 담은 드라마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최근 종영한 <미생>이라는 작품을 쓰기 위해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는 무려 5년 가량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밖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세부 집단 간의 갈등과 협력, 그리고 업무의 순환 등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려고 노력했던 것이죠. 그렇다 보니 ‘미생’은 허무맹랑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라 진짜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절절히 담아내는 작품으로 자리잡게 됐습니다. 같은 채널에서 중요한 드라마 연작으로 밀고 있는 ‘식샤를 합시다’라는 작품도 주목해 볼만 합니다. 한 오피스텔에서 각각 1인 가구로 살아가는 20대 후반~30대 초중반 싱글들의 삶을 다룬 작품입니다. 여주인공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가 일찌감치 헤어지고 혼자서 강아지와 살아가는 로펌의 직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자신이 열독하는 블로그의 운영자인 ‘식샤님’이 옆집에 살고 있는 남주인공이었습니다. 그의 오프라인상 직업은 보험설계사 겸 세일즈맨이었죠. 두 사람은 맛있는 밥을 먹으며 감동을 받고, 지나간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사랑을 키워갑니다. 이 작품은 우리 주변 싱글 남녀의 소소한 현실이 잘 반영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펀치’라는 드라마는 검사들의 이야기로 눈길을 끕니다. 권부와 결탁해서 자신의 지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검찰총장과 그에게 기생하여 출세를 꿈꿨지만 상황의 반전으로 인해 내쳐진 남주인공, 그리고 정의감을 갖고 살아가지만 결국 남편과 그의 상관인 총장을 비극으로 몰아야 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집니다. 이 작품은 사회정의 차원에서 검찰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권의 개입과 압력에 의해 전혀 다른 법적 진실이 생산될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현실적인 의심’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청자들은 <펀치>를 시청하면서 부조리에 분노하고 주인공의 문제 해결을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복잡한 사회 구조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간접적 경험을 하는 셈입니다.

왜 이토록 현실적이면서 특정 직업을 속속들이 파헤치는, 즉 현실적인 주제의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액자구성이 갖고 있는 가치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더이상 자신과 전혀 다른 인물이 작품에 출연하여 환상을 그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일상을 면밀히 그려내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잠재된 욕구까지 표현해 줄 수 있는 스토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드라마는 고도의 데이터 분석과 사람들의 삶에 대한 시뮬레이션 모델링으로 점철된 ‘현대 사회의 거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적당한 수준의 픽션과 재미, 그리고 영향력 있는 배우들의 배치로 단순한 성공 공식을 누려 왔다면, 이제는 흡사 자기계발서 또는 인문학 책들이 말하는 삶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극화하여 보여주는 것이 드라마의 소임이 된 것이죠.

사실 드라마라는 장르가 계속해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현실 속에서 그보다 더 엄청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작품이든지 기획 의도와 배경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벌어졌던 사건이나 의심에서 출발한 드라마가 많습니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내 이야기 혹은 내가 아는 누군가의 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특정 직업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각광을 받는 다는 것은 흥행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사회의 각 분야에 포진해 있는 전문가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 한번 고민해 보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힘의 논리와 가치와 철학의 논리 사이에 어떤 선택을 해 왔던가 자성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그 드라마는 충분히 ‘변화’를 주도하는 힘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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