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차 선가동-후인수] 또 정치논리.. '기아악몽'떠오른다

삼성자동차 처리 문제가 한바탕 논란끝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삼성생명 상장」이라는 비장의 카드가 결국 시한부 무효패로 확인되면서 삼성차 처리 방식은 오히려 더 복잡하게 꼬이고 있다. 정부는 삼성자동차 부채처리가 사실상 불확실해진 상태에서 지역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일단 부산공장을 살려놓겠다는 입장을 정리했으나 채권단이 강력 반발하고 나서 「선(先)가동- 3자인수」의 성사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해결된 것은 거의 없이 생보사 상장문제를 놓고 정부와 삼성그룹간에 득실 계산만 요란하다 불발로 그칠 형편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삼성자동차 처리수순이 기아사태 때와 똑같이 「先가동- 後인수」「법정관리- 채권단 지원」 쪽으로 가닥을 잡음에 따라 삼성자동차가 「제2의 기아」처럼 변질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부실기업 처리를 둘러싼 정책혼선과 정치논리 개입에 따른 처리 지연이 결국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이어져 또다른 국가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다시 개입된 정치논리= 삼성자동차 처리를 둘러싼 정부 방침이 딱 부러지게 결정되지 않은채 어수선한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정부는 5일 총리공관에서 김종필(金鍾泌)총리주재로 삼성자동차 처리를 둘러싸고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했다. 미국을 방문중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4일 워싱턴에서 『삼성자동차 처리 문제에 대해 삼성측이 대안을 제시해 정부와 채권단이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金대통령의 발언과 5일 총리주재 회의 긴급소집 등을 미루어 보건대 지난 3일 강봉균(康奉均) 재경부장관 주재로 열린 경제대책조정회의 결정사항이 뭔가 미진한 부분을 남기고 있음을 시사한다. 당초 지난 3일 청와대회의는 삼성차 처리를 「先가동-後인수」방식으로 해결한다는 입장을 정했었다. 선가동 후인수 방식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방미에 앞서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을 재가동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한데 따른 것으로, 부산민심 추스리기라는 정치 포석의 의미가 강하다. 삼성자동차를 청산시키겠다는 내용이 부산지역 민심을 자극했고 이것이 향후 정치일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일단 부산공장을 재가동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문제는 부산공장 재가동에 따른 추가부담을 누가 지느냐다. 이헌재(李憲宰) 금감위원장은 『삼성차 부산공장은 현행대로 자동차생산기지로 활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부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밝혀 부산공장 재가동에 필요한 운용자금을 채권단이 지원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채권단은 이에 강력반발하고 있다. 삼성생명 상장유보로 자동차 부채처리를 위한 채권 확보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채권단이 추가부담을 떠안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결국 정부는 부산민심 살리기라는 정치논리를 앞세워 채권단에 모든 부담을 떠넘기고 있으며, 확실한 결론없이 일단 공장을 재가동하면서 시간을 벌어보자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게 채권단의 해석이다. 4일 열린 대책회의에 경제대책조정회의 정식 멤버가 아닌 김정길(金正吉) 청와대 정무수석과 김한길 정책수석비서관이 각각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정치논리의 개입 의혹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해결된게 없다= 삼성차 처리과정을 되짚어보면 한마디로 해결된 것은 하나 없이 메아리만 컸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 이번 삼성차 처리는 이건희(李健熙)회장의 삼성생명 보유주식 400만주가 주거래은행에 「위탁」된 것 외엔 달라진 내용이 거의 없다. 대우전자가 배제된 상태에서 추진해 온 종전의 「삼성차 빅딜」과 「법정관리후 3자인수」라는 이번 결정과의 차이가 모호하다는 얘기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럴 바에야 애초부터 삼성그룹이 스스로 자동차 처리를 결정하도록 할 것이지 정부가 끼여들어 빅딜 운운할 이유가 있었느냐』며 정책결정 과정의 혼선을 비판하고 있다. 결국 이번 삼성자동차 처리 해법은 실속은 없이 정부, 채권단, 삼성간의 이해대립만 극명하게 드러낸 미봉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아사태의 재판인가= 공교롭게도 이번 삼성차 해법은 2년전 기아자동차 처리 수순과 매우 비슷하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先가동-後인수라는 명분 아래 부실기업 정리를 질질 끌다 결국 외환위기를 자초한 기아사태의 재판으로 비화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우선 정책결정 과정에서 난맥상을 드러냈다는 점이 지목된다. 삼성생명 상장이라는 성사 가능성이 낮은 카드를 내세웠다가 여론의 포화를 받고 곧장 정책을 번복하는 과정에서 대외신인도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꼬일대로 꼬인 자동차 빅딜을 해결하기 위해 삼성생명 상장이라는 「꽃놀이패」를 썼지만 결국 「자충」으로 끝나버렸고 그 결과 정부의 정책수행 능력에 회의만 키우고 있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채권단의 희생을 전제로 삼성차 처리를 위한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다』며 『자칫 제2의 기아사태로 변질될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이종석 기자 JSLEE@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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