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현대판 봉이 김선달 '대리구매'


"백화점에서 제 값 주고 산 사람만 바보가 됐네요."

30대 직장 여성 정모씨는 울분을 터뜨렸다. 그가 뿔난 이유는 고가 의류를 인터넷 카페 회원들에게 '대리구매'해주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긴 현대판 '봉이 김선달' 때문이었다.

발단은 ㈜한섬의 고가 여성 의류 브랜드인 타임과 마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한 인터넷 카페였다. 이곳에서는 한 벌에 100만원을 훌쩍 넘는 이들 브랜드 옷을 상대적으로 싸게 살 수 있는 '벼룩게시판'의 인기가 높았다. 특히 신상품을 시중가보다 25%가량 싸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대리구매'가 입소문을 타면서 20~30대 직장 여성들이 많이 몰렸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대리구매를 진행하는 이들은 유명 백화점들이 우량고객에게 제공하는 할인혜택, 매출진작을 위해 브랜드가 제공하는 5% 에누리 혜택을 종합적으로 활용해 정가보다 30% 싸게 옷을 샀다. 이후 카페 회원들에게 25% 정도 할인된 가격에 되팔았다. 물건을 사고 팔며 5%의 차익거래를 실현하는 셈이다.

대리구매가 인기를 얻을수록 물건을 떼오는 이들의 지갑도 두툼해졌다. 워낙 고가 브랜드이다 보니 대리구매로 연 1억여원을 남긴 사람도 있다는 뒷말이 나돈다. 뭔가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넘어갔다. 대행업자(?)들끼리 할인율도 담합했다. 이 과정에서 대리구매의 속사정이 카페 회원들 사이에 알려지자 며칠 전까지 '능력 있는' 직장 여성으로 선망 받던 대리구매자들이 하루아침에 비난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들을 형사고발해야 한다거나 국세청에 신고하겠다는 격앙된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시장에서 가격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고가 제품이 비싼 값에도 팔리는 것은 '누구나 이 가격에 산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대리구매 행위로 타임과 마인의 정상 가격을 더 이상 믿기 어렵게 됐다.

카페 내 대리구매 행위를 알면서도 수수방관했던 한섬 본사, 고객 한 명이 같은 옷을 사이즈별로 수십벌 사가는 상황을 보면서도 의심하기는커녕 구입을 부추겼던 매장 직원들은 가격질서 파괴에 힘을 보탠 일등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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