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북한이 아세안지역포럼(ARF) 외교장관회의가 열리는 브루나이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는 가운데 2일 공개될 ARF 의장성명이 승패의 가늠자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핵 문제 해결방안으로 미국은 '북한의 변화'를, 중국은 '6자회담 재개'를 촉구하고 있어 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남북 양측의 물밑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박의춘 북한 외무상은 1일(현지시간) 브루나이의 수도 반다르스리브가완에 자리한 엠파이어호텔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양자 회담을 가졌다. 북한은 앞서 최룡해 특사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중국에 파견, 대화 의지를 밝힌 바 있으며 이번 회담에서도 이 같은 입장을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왕 부장은 회담 이후 기자들과 만나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하고 있고 이것은 우리의 변하지 않은 입장"이라며 "중국은 6자회담 참가국들과 함께 한반도 문제가 해결 궤도로 접어들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중국 역시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대화를 중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왕 부장의 이 같은 발언은 6자회담 재개로 탈출구를 마련하려는 북한 측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분석이다.
박 외무상은 이외에도 이날 인도ㆍ브루나이ㆍ베트남ㆍ인도네시아 등과 양자 회동을 진행하는 등 여론몰이를 위해 애썼다. 이 중 인도 측은 북한과의 양자 회담을 통해 핵무기 관련 기술이 파키스탄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도 6자회담 당사국들과의 만남을 비롯해 제16차 한ㆍ아세안(ASEAN)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는 등 이번 외교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 윤 장관은 이날 오후 한미일 외교장관회의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하는 3국 간 공감대를 재확인했다. 한미일 3국은 이번 회동으로 지난달 워싱턴에서 진행된 3국 6자회담 수석대표 간 회담에서 도출된 "북한과 대화를 위한 대화는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3국은 또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협조가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중국 측과 꾸준히 협의하기로 했다.
브루나이에서 진행 중인 남북 간 외교전의 분수령은 2일 오후 공개될 ARF 의장성명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우리 측은 북한의 비핵화와 9ㆍ19공동성명 준수를 촉구하는 안건을, 북한은 한반도 긴장의 원인이 미국의 '적대정책'이라는 안건을 넣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황이다.
ARF 의장성명은 서로 간 입장차이가 클 경우 의장 직권으로 성명을 채택하는 경우가 있어 외교력이 안건 채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윤 장관이 전날 다자 회의를 통해 2014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의 한국 개최를 이끌어내는 등 상황은 우리에게 다소 유리한 편이다.
한편 관심을 모았던 박근혜 정부 들어 첫 한일 외교장관 간 양자 회담에서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간극만 재확인했다는 평가다. 윤 장관은 회담 모두발언에서 "이 자리에서 역사는 혼이라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며 "역사 문제는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이라며 일본의 태도변화를 촉구했다. 이에 대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은 "일본은 과거 많은 국가에 피해를 줬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으며 지금 내각도 마찬가지"라며 원론적 수준에서 답했다. 이번 한일 외교장관회담은 9개월 만에 성사된 것으로 일본 측이 먼저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