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유창혁 '창'끝 다시 뾰족해진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 유창혁9단의 창끝이 다시 시퍼렇게 날이 서고있다.유창혁은 지난5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후지쓰배 8강전에서 일본의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9단을 일방적으로 몰아부친 끝에 203수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유9단이 「국제전의 사나이」로 불릴만큼 큰승부에 강한 것을 고려하면 이번에도 후지쓰배를 거머쥘 가능성이 높다. 통산전적 17승3패, 승률 85%. 유창혁이 99년 국내외 기전에서 만들어낸 성적이다. 유9단은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팬들을 안타깝게 하더니 올해들어 화려하게 비상하고 있다. 계기는 지난해 12월 배달왕 타이틀을 차지하면서부터. 그는 자신이 『역시 세계최강』이라 인정했던 이창호9단을 누르고 21개월만에 「무관의 제왕」에서 탈출했다. 이후 성적은 한마디로 승승장구. 서봉수·최규병·목진석·최명훈 등 중견강호는 물론 신예주자들도 유창혁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호쾌한 기풍으로 「일지매」라 불리는 유창혁은 성적의 기복이 심한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승부가 클수록, 상대가 강자일수록 무서운 괴력을 뿜어낸다. 그는 춘란배를 제외하곤 국제 타이틀전 결승에 모두 진출한 진기록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집중력과 체력이 떨어진다는 게 약점이다. 보통 한달간 5번기로 치러지는 국제대회 결승전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다. 국제대회 역대 최다 준우승자로 「준우승 전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애칭을 가지고 있다. 특히 큰대회에서 한번 지면 그뒤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는 게 치명적인 결점이다. 지난해 2월 열린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이 대표적인 예다. 이창호9단을 힘들게 이기고 결승에 오른 유창혁은 전력에서 한수 밀리는 왕리청(王立誠)9단에게 2대3으로 역전패하더니 한동안 슬럼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97년 우승상금 3억3,000만원이 걸린 삼성화재배에서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9단에게 아쉽게 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한번 불이 붙으면 무서울 정도로 기세를 올린다는 것도 유창혁만의 강점이다. 바둑 관계자들이 후지쓰배를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이창호를 꺾은 여세를 몰아 후지쓰배까지 차지한다면 「유창혁 전성시대」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7월3일 준결승전에서 맞붙을 상대는 일본에서 활약중인 조치훈9단. 통산전적은 4승5패로 약간 밀리지만 전문가들은 유창혁의 우세를 점치고 있다. 조치훈은 엄청난 장고파. 이틀 연속 열리는 일본 국내기전에는 강하지만 속기전인 국제기전에는 약하다. 반면 유창혁은 93년 우승, 94년 준우승을 차지해 「후지쓰배의 사나이」로 불리는 기사. 결승까지 모든 대국을 단판승부로 펼치는 후지쓰배의 진행방식이 다번기에 약한 유창혁에게 유리한 덕분이다. 게다가 유창혁은 지금 상승세다. 좋아하는 술도 멀리하고 체력단련과 바둑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그는 요즘 자료실에서 일본 기보를 엮어놓은 「기도(棋道)」를 한번에 10권씩 빌려가는 일이 많다고 한다. 웬만한 국내 기보는 이미 다 보았다는 얘기다. 유창혁의 성적이 저조할 때 그 공백을 최명훈6단, 이성재5단 등 신예강호들이 산발적으로 메워왔다. 그러나 대국 열기, 팬들의 관심 등에서 유창혁이라는 빅카드를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잠자던 맹수」 유창혁이 수면위로 솟구쳐오른다면 이창호의 독주에 질려있던 바둑계도 한층 더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후지쓰배 준결승에 오른 또다른 기사는 마샤오춘(馬曉春)9단과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9단. 결승전은 8월7일 열릴 예정이다. /최형욱 기자 CHOIHU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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