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청문회를 할 때 현대그룹의 총수 정주영씨는 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공세에 답하기를 “시류가 그러해서 돈을 주었다”고 말했다. 정치자금을 안주면 권력과의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고 권력과의 불편한 관계가 되면 은행 돈줄이 막히고 사업확장마져 봉쇄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었다.정치자금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장의 이면사 가운데 들어앉은 커다란 흐름은 돈을 매개체로한 부조리였다고 할 수 있다. 은행에도 돈, 관청에도 돈이 흘렀다. 명분이야 경제성장을 내 걸었지만 이권경제가 지배했던 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치에 의해 경제가 끌려 갈 때 결과하게 되는 구조적인 틀이다.
DJ노믹스가 내세운 구조조정에 따라 재벌에 대한 빅딜이 진행중에 있다. 그런데 정치적 선전만큼 속도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급기야 대통령이 나서고 은행단을 앞세운 금감위의 압력이 거세졌다.
돈 될 것 팔아치우고 합병작업을 진척시키지 않으면 권력주변이고 금융기관이고<접근금지>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다 낌새야 알아차릴만한 일이지만 빅딜은 재벌이 좋아서 하는 작업은 아닐 터이다.
오직 그 길만이 한국경제를 살리는 거라고 말하지만 당하는 쪽은 재벌죽이는 소리라고 볼이 매 있을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가 있다. 그래도 워낙 분위기가 분위기인데다가 사회적 압력까지 가세되어 그쪽으로 밀려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재벌에게는 새 시류로 받아들여질 듯 하다.
사물에는 태생적인 제약이란 것이 있다. 제도와 흐름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제도와 흐름이 자생적이냐 타율적이냐에 따라 결과는 제약을 받게 된다. 자생적일 때는 힘이 붙지만 타율적일 때는 더 큰 힘의 눈치를 보고 그 힘에 끌려가게 되고 그 지배를 받는다.
빅딜 자율론은 재벌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논리적 음모가 개입되어 있다고 개혁쪽에서는 공격하지만 관치의 또다른 개입이란 면에서 보면 옳은 소리다. 아무리 돈 안받고 시장경제를 보장할 것이라고 소리를 높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긴가 민가다. 전임 노태우 대통령은 돈 한푼 안받고 경제의 자율성을 보장한다고 했다.
그리고 취임 다음해 재벌에 대한 대대적인 내부자거래 조사를 국세청에 명령했다. 불공정거래에 대한 당연한 응징이지만 실은 정치자금이 정말로 안들어와 재계에 대한 압력 카드로 활용하려던 것이 정치적 내막이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돈을 안받겠다고 했지만 국정에 개입했던 아들은 돈을 받았다.
재벌들의 새 시류에 대한 대응법이 궁금하다. ‘정말 순진하게’구조조정만으로 답할 것인지 아니면 사람 편하고 기업 편하게 금맥을 병행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아무래도 1년도 안남은 총선과 선거판 그리고 정치자금이 신기루처럼 그 너머에서 떠 오른다.
/孫光植(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