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168> 기록 그리고 기억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좋았어, 괜찮았어 또는 힘들었어처럼 24시간 동안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을 응축하는 단어는 대부분 기분과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하루의 인상은 내가 가장 많은 감정을 소비한 사건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사건의 절대적인 시간과는 큰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분노의 단 몇 분 때문에 하루가 통째로 최악이라고 기억되는 건 정신 건강상에도 이롭지 않을뿐더러 묘하게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하루를 찬찬히 되돌아 볼 시간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아쉬운 일이 방학이 끝나가는 것이었다면 가장 두려운 일은 밀린 방학숙제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기 쓰기가 압권이었죠. 요즘의 초등학생은 사정이 좀 나아졌을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무리 쥐어짜도 생각나지 않는 날씨 때문에 고군분투하고, 창의력을 발휘해 없던 사건마저 만들어내느라 씨름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20년 전에는 몰랐던 일기 쓰기의 중요성을 요즘에서야 느끼는 기자로서는 핑계지만 오히려 분량과 틀, 구성에 자유가 주어졌다면 덜 밀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다면 오늘은 뭘 했다, 어디에 갔다 식의 사건 나열에서 벗어나 일기의 본래 목적인 하루를 반추하는 용도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하고 있는 일기 쓰기는 어렸을 때 했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잠들기 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있었던 일을 되돌아 본 다음,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기록합니다. 기분 나쁜 기억은 쉽게 잊혀져야 한다는 생각에 ‘다음 번엔 이렇게 해야지’라는 다짐 정도로 끝내죠. 지극히 사소하지만 활력을 불어넣는 데는 꽤 효과적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틀린 문제는 다시 틀리지 않으리라’ 이를 갈며 오답노트 만들던 추억도 떠오르고요.

필수품인 스마트폰이 메모장의 역할을 겸하면서 기억의 범주는 좁아지는 대신 기록의 범주는 넓어졌습니다.. 삐삐가 대세였을 때는 친한 친구 전화번호 10개쯤은 손쉽게 외웠는데 요즘은 집 전화번호도 가끔 헷갈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전에 즐겨 쓰던 다이어리 역시 스마트폰이 상당 부분을 대체했죠.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온갖 개인정보를 기억하는 대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 위해 기록하는 걸 넘어서 남과 같이 보기 위해 기록하는 SNS로 공유공간의 개념이 생기면서, 기록의 영역 역시 확장됐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라이프로깅(Lifelogging)’이라고 합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는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부터 음식 사진, 애완견 사진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업로드한 온갖 정보가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자기 표현을 위해 SNS에 삶을 남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도 합니다. ‘허세다’, ‘가짜 행복이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자기 이미지를 꾸미는 사람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조금은 이해해 줘야 하는 게 아닐까요. 누구나 자기 삶을 행복하게 색칠해 가려는 마음은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온라인 상에 올라온 타인들의 기억을 조금은 더 따뜻한 시선으로 품어주는 것쯤의 여유는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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