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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담합과 관련한 굵직굵직한 소송에서 연달아 패소해 체면을 구기고 있다. 시장과 기업에 대한 이해나 철저한 증거조사가 부족한 가운데 담합행위를 잡겠다는 의욕만 앞선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행정6부(안영진 부장판사)는 최근 방위산업체인 삼성탈레스가 공정위를 상대로 "담합을 이유로 한 26억7,800만원의 과징금과 시정명령 처분을 취소하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했다.
삼성탈레스는 지난 2009년 차세대 잠수함인 장보고Ⅲ에 탑재될 전투체계와 음향탐지장치인 소나(sonar)체계 사업의 입찰공고가 나오자 전투체계 부문에 단독 응찰해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경쟁사인 LIG넥스원은 소나체계의 우선협상자가 됐다. 공정위는 삼성탈레스 등이 경쟁사와 사업을 나눠 먹기 위해 사전 협의했다면서 2012년 과징금과 시정명령 처분을 내렸다.
재판부는 "국외 기술협력을 제한한 상황에서 각 회사들은 다른 분야에 입찰할 만한 충분한 기술력이나 경험이 없었던 사실이 인정된다"며 "공정위는 삼성탈레스와 넥스원이 각각의 입찰에서 충분히 독자 개발 수행이 가능하면서도 입찰건별로 나눠먹기 위해 합의를 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이번 패소판결은 해당 업계에 대한 공정위의 몰이해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많다. 방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술력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 응찰해봤자 경쟁사에 뒤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입찰하지 않은 것을 담합이라고 본 것은 무리한 해석이었다"라고 설명했다.
공정위의 처분이 업계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드러난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공정위는 2008~2009년 롯데칠성ㆍ해태음료 등 음료업계가 주스 가격을 담합해 전체 음료시장을 왜곡시켰다는 이유로 226억원의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업계는 주스 가격 담합사실은 인정하지만 이 행위가 업계 전체에 영향을 줬다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며 반발했고 4월 대법원은 업계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재판부는 "음료시장은 먹는 샘물부터 두유, 기능성 음료, 탄산음료 등 여러 상품으로 나뉘는데 기능과 효용, 대체 가능성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 등을 볼 때 이 시장은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며 "주스 가격 담합이 음료시장 전체를 왜곡시켰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판시했다.
지난해 6월 서울고법도 2009년 소주가격 담합을 이유로 과징금 250억원이 부과된 소주업계가 낸 소송에서 업계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재판부는 국내 소주업계의 가격인상이 국세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엄격히 제한돼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가격담합이 있긴 했지만 이런 행위를 국세청 등 국가기관이 지배하는 이상 시장질서를 왜곡시킨 정도가 중대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공정위의 부실한 증거조사가 패소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공정위는 앞선 21일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사와의 원적지 담합과 관련한 소송에서도 완패한 바 있다.
2011년 공정위는 정유사들이 10여년 동안 주유소가 거래처를 옮길 때 기존 거래처에 허락을 받도록 하는 '원적지 관리'에 합의해 소비자에게 피해를 끼쳤다며 총 4,3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해당 사건은 4대 정유사 중 한 곳인 GS칼텍스 직원의 리니언시(자진신고)로 처분이 이뤄졌다. 그러나 재판부는 자진신고자의 고발 내용이 믿을 만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의 주심인 정재오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자진신고자의 진술을 보면 합의내용이 본사에 보고된 적도 없고 자꾸 진술이 바뀌는 것은 물론 원적지 개념도 엇갈리는 등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며 "10년간 담합의 증거로 삼아 엄청난 금액의 과징금을 부과하기에는 진술자의 신뢰도나 증거가 너무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리니언시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공정위의 처분에 대한 업계 불만은 특히 높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슈퍼갑 중의 갑인 공정위가 업계 관계자를 불러 '벌써 증거를 다 확보했으니 자진신고하는 게 낫지 않냐'고 회유하거나 '안 하면 처벌이 더 강해진다'고 엄포를 놓으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며 "너무 힘든 나머지 그냥 자진신고하고 급한 비를 피하자는 마음에 신고자들이 하나씩 나오는 것이고 이는 업계 모두의 피해로 확산된다"고 전했다.
공정위가 담합의 범위를 기존 법을 넘어설 정도로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패소한 사례도 있다. 지난달 17일 생명보험사들과의 이율담합 소송에서 패소한 예가 대표적이다.
공정위는 2011년 12월 생보사들이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시장에 공개되지 않은 미래 예정이율 등에 관한 정보를 공유한 후 이를 반영해 각사의 이율과 보험료를 결정했다는 이유로 삼성생명 등 16개 생보사에 총 3,653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 측은 정보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부당한 공동행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가격결정 등의 행위에 대한 합의가 없는 한 우리 법제상 담합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 판사는 "생각이 너무 앞서 단편적인 현상을 전체로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다거나 기업의 도덕성을 문제 삼아 무리하게 법제를 적용할 때 이 같은 결과가 나온다"며 "공정위가 경제검찰로서 제 역할을 하려면 충분한 조사와 실증을 통해 어떤 사회현상이 담합이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