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서울지법 남부지원의 판결에 이어 오는 31일로 예정된 행정법원과 서울민사지법의 판결(대한생명에 대한 부실금융기관 지정 및 감자명령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대한생명의 운명을 판가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날 법원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더라도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최순영(崔淳永) 신동아그룹회장과 금융감독위원회의 다툼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대한생명 조직이 현저히 흔들리고 있다. 단체보험계약 해지가 크게 늘어나는 등 계약자들의 이탈이 줄을 잇고 있다. 양측간 분쟁에 회사만 골병들고 회생여부가 불투명해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정부가 대한생명 처리의 첫단추를 잘못 끼우는 바람에 혼선이 증폭됐고,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의 후유증은 고스란히 회사가 떠안게 됐다. 정부는 멀쩡하게 주인이 살아있는 기업을 부실 금융기관 지정도 않은 채 제3자에게 넘기려다 옥중의 대주주에게 법원 판결에 의한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대한생명 관계자는 『회사가 인질로 잡혀있는데 구조대(금감위)가 앞뒤 안가리고 들이닥쳐 마구 총을 쏘는 바람에 희생만 늘어나게 된 형국』이라고 말했다.
◇누가 이겨도 회사는 누더기= 전문가들은 『어느 쪽이 승소하더라도 대한생명은 외줄을 타는 생사기로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소송을 제기한 최순영 회장이 이기면 대한생명은 미국 파나콤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지만, 금감위의 주장대로 「파나콤이 대한생명을 정상화시킬만한 자금력이 없다」면 대한생명은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대한생명은 그동안 「정부의 힘」에 의존해 부도를 모면하며 버틸 수 있었던게 엄연한 사실. 그러나 능력이 입증되지 않은 파나콤이 단돈 500억원만 집어넣고 영업을 한다면 시장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불을 보듯하다. 파나콤이 대한생명 자산부족액인 3조원을 충당할 수 있다는 능력을 증명해야만, 대한생명은 부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금감위가 이겨도 공적자금 투입 못한다= 금감위는 최순영 회장이 제기한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기각되면 곧바로 감자결의를 거쳐 공적자금 500억원을 투입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그러나 오는 31일 판결에서 금감위가 이기더라도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금감위가 파나콤의 지분참여를 막기 위해 제기한 가처분신청이 지난 28일 서울지법 남부지원에서 기각됐기 때문이다.
파나콤이 당초 예정대로 30일 주금납입을 한다면 대한생명의 수권자본금은 800억원으로 늘어나 꽉 차게 된다. 금감위가 31일 판결에서 이겨 전액감자를 단행하더라도 수권자본금 800억원 한도가 채워진 이상, 공적자금 500억원을 밀어넣을 구멍이 없다. 수권자본금 규모를 늘리기 위해서는 주주총회와 이사회 의결을 거쳐야 하는데 최순영 회장이 이를 동의해줄리 없다.
금감위와 공적자금 투입주체인 예금보험공사는 이같은 문제점 때문에 지난 26일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했었다. 결국 대한생명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방침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전망이다.
◇금감위 신청, 왜 기각됐나= 법원이 지난 28일 금융감독위원회와 예금보험공사가 제기한 대한생명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이유는 두가지다. 민간기업이 자력으로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것을 정부가 막을 이유가 없으며 국민의 세금부담인 공적자금 투입은 억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의 이같은 판결은 앞으로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와 민간기업간에 예상되는 각종 분쟁에도 큰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재판부는 『금감위가 「파나콤이 500억원을 증자하면 수권자본 소진으로 재무개선에 배치된다」고 했으나 공적자금 투입도 마찬가지로 500억원이며 대한생명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서는 2조원 이상이 투입돼야 한다는 예상에 비춰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금감위 관계자는 『법원이 공적자금과 사적자금을 구분 못하고, 같은 500억원이라면 민간기업이 투입하는게 맞다고 본 것 같다』며 『파나콤 인수로 대한생명 경영이 엉망이 된다면 결국에는 국민부담만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상복 기자SBHA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