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도스, 현주 ‘감각 덩어리(masse du sensible)‘ 展

이현주, oo-_Digital C printing, Diasec_100x100cm,_2010(사진=갤러리 도스 제공)

갤러리 도스에서는 2014년 상반기 ‘고(高)리(理)’를 주제로 릴레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작가 이현주는 이러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2일부터 18일까지 ‘감각 덩어리(masse du sensible)’展을 연다.

현주의 작업은 분명히 공적 공간에서 보고, 보여지는 것이 불편한 이미지와 매체를 포함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가장 강력한 금기의 대상인 인간-여성의 몸이 놓여있다.

현주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기억의 흔적을 표현하는 데에 몰두하면서부터 몸에 집중하게 되었다. 작가는 마음과 몸에 대한 형이상, 하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보편성을 회의하는 동시에 경계의 침투를 제안한다. 몸을 압박하는 코르셋과 뾰족한 하이힐처럼 몸의 물리적인 흔적과 경험을 드러내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몸의 표면에 남는 흔적뿐만 아니라 몸의 깊숙한 곳에 남는 흔적을 표현하기 위해 감정이나 상상을 고취시키는 작업으로 그 영역을 확장했고 양가성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작가의 최종 종착지는 치유의 실현이다. 이 세상의 존재들은 모두 양가적 속성을 갖는다. 현주는 세계의 가장 솔직한 모습인 양가성을 받아들이고 인위적인 경계를 넘나들 때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0.03> 시리즈와 <거푸집 mould> 시리즈는 이러한 작가의 지향점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0.03> 시리즈는 오카모토 콘돔 안에 폴리에틸렌을 채워 굳힌 후 스테인리스 스틸로 캐스팅한 것이다. 그런데 남성용품인 콘돔을 매체로 사용했음에도 완성된 작품은 여성 유방의 형태이다. 이후 <0.03> 시리즈는 여러 개의 개체가 군집을 이루는 것으로 진화하여 여러 개의 유방을 가진 풍요와 양육의 상징인 지모신으로 변모한다. 남성적 상징이 여성적 상징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한편 <0.03> 조각의 군체를 머리에 쓰고 있는 여성의 사진인 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공존이자 양가적 속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존재인 메두사가 떠오르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콘돔은 남성의 피부를 감싸는 것이지만 여성의 피부와 맞닿는 것이기도 한다. <0.03>은 유연한 관계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작업이다. <거푸집>은 라이프 캐스팅으로 제작된 거푸집의 외부 표면을 캐스팅 한 것이다. 인체가 아닌 거푸집의 캐스팅으로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또한 몸을 감싸기 위한 것이다. 이 시리즈는 스스로의 내면을 치유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거푸집은 언제나 몸의 일부만을 가려주는데 이 역시 세계와 존재의 관계가 결코 끊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한편 <거푸집>을 입고 있는 인체는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진정한 치유와 성장을 위해서는 묵묵한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함을 시각화한 것이다. 여기에는 정반대의 의미, 현대인들을 압박하고 억압하는 사회적 경계와 틀을 상징한다. <의자-탁자 Chair Table> 시리즈는 양가적 속성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이 작품은 각각 의자와 탁자, 의자와 서랍탁자의 속성을 모두 가진 가구와 그 이미지를 이용한 합성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개의 역할을 다 하는, 매우 효율적으로 보이는 이 가구들은 사실 모순적이다. 기능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면 사용자의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도 작가는 치유의 작용을 잊지 않는다. 서랍탁자의 내부에 담긴 물에 그 해답이 있다. 물은 구체적으로 어머니의 양수를 의미, 임신 중에 태아를 보호하고 출산 시에 분만을 도와주는 생명의 상징이다. 양수가 담겨 있는 의자 안에 들어가 있는 인체는 세상에 나갈 순간을 기다리는 태아와 같으며 그 순간 또 하나의 <거푸집>으로 전환된다. 최근 들어 작가는 <자수 드로잉 Drawing Fabric> 시리즈를 통해 치유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도 양가적 반전은 존재한다. 실과 천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늘로 천을 찌르는 행위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것은 상처 내기와도 같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선행되는 상처 내기처럼 양가적인 상황을 없을 것이다. 상처를 받지 않는 존재에게 치유란 불필요하다. 모순적이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태생적으로 미술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다층적이고 동시적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공존하며 양가성이 균형을 이루고 서로를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미술이다.

현주의 작업 역시 내면과의 대화이자 관객과의 대화이자 세계와의 만남이다. 자신을 보호하고 치유하기 위한 보호막이지만 성찰을 위한 상처내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업을 진행하면서 양가성을 온 몸으로, 정신으로 체험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리고 그 필연적 과정에서 몸과 내면-정신이 치유된다.

문의: 갤러리 도스(☎02-737-4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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