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찢는 소리 때문에 주나라가 망했다.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를 즐기던 왕의 애첩 서시의 변태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라가 결딴난 것이다. 아까운 물건을 찢어버리는 취미는 파괴를 속성으로 한다. 그러나 파괴와 창조는 동전의 앞과 뒤이다.화가 고영훈씨(46)는 책위에 돌을 많이 그린 사람이다. 나라가 답답했던 80년대 초반 영문책자 위에 돌이 놓여있는 그의 그림을 보고 관계기관에서 작가에게 전화가 왔다. 『영문으로 상징되는 미국에 돌을 던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요』라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책자가 돌을 보듬어안는 그림이다』고 해명했다.
작가는 배경에 「DEAD」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그림 한 점을 외국화랑에 보냈다. 몇년간 아무도 찾는이 없어 지금은 어느 구석에서 숨을 쉬고 있는지 모른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가 「죽음」을 형상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예찬 또는 두려움때문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있는 탓이었다.
고영훈씨가 6년만에 국내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12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02~3216-1020)에서 평면작품 30여점과 입체작품 20여점이 선보이는 자리이다. 특히 파라핀에 오브제를 넣은 입체작업들과 설치작업들은 고영훈 회화의 특징인 즉물성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해외전시에 주력해온 고영훈씨의 작품은 이제까지 대략 200여점이 외국 컬렉터의 손에들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영훈씨의 작업은 극사실주의를 바탕으로 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모아진다. 해서 그는 죽음과 삶, 파괴와 창조를 더불어 세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만유유변(萬有有變)의 현장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것이지 나라나 사람을 죽이려하는 것도 아니고 구태여 살리려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번 전시에 「솔거(率居)를 위하여」라는 제목을 달았다. 소나무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 새가 날아와 앉으려다가 미끄러질 정도였다는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의 이름을 차용한 작가의 설명은 이렇다.
『사실주의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면서도 당시의 정치·경제적 사건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100년 또는 그 어떤 의미의 시간에도 왜곡되지 않는 사실을 중시하려 했습니다. 순수한 사물 그 자체를 탐구하려 했던 것이지요.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내가 탐색하려는 주제입니다』
고영훈씨는 실제 책의 낱장을 뜯어 수직수평으로 연속배열하고 책장과 책장 사이에 그림자 효과를 반복해 배경을 꾸미고 그 위에 아크릴로 돌이나 구두 또는 돋보기등을 그린다. 박제된 새등 오브제도 동원된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그가 그리는 사물은 그 의미를 달리한다. 그는 순간을 포착하고 감상자는 자신의 인생살이를 그곳에 투영해본다. 신발회사 사장은 신발그림을 반겨하고 수학자는 배경에 깔린 수학공식을 탐색한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작가 고영훈씨의 작업은 극사실이라는 필법을 통해 기억의 잔흔들과 만나면서 지평을 무한대로 확대해 나간다.
【이용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