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민주화 ‘성공의 덫’서 벗어나 새 성장 패러다임 만들어야”
제조업 고도화 서비스업 융합 ICBMS 인프라 확대가 중요
초당적 국가미래전략원 신설 반관반민 중립적 운영 필요
거대한 중시장 한기술력 접목 ‘메이드 위드 차이나’로 가야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년 전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가 시속 100km라면 문화예술은 80km, 정부나 노조는 20~30km, 학교는 15km, 정치는 5km로 달리는 형국이에요. 압축 성장과 성공의 덫에 갇히다 보니 산업화·민주화를 이끈 집단이 이제는 오히려 발전보다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최근 서울 역삼동 한국공학한림원에서 서울경제신문 취재진과 만난 오영호(63·사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깊게 고민하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3시간 인터뷰 동안 공학교육의 일대 혁신과 제조업 고도화와 서비스업 융합, ICBMS(IoT·Cloud·Big Data·Mobile·Secutity)인프라 확대,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 다양하고 선진화된 사회구조를 강조했다.
대담=고광본 정보산업부장 kbgo@sed.co.kr
-세계가 그물망처럼 연결되는 사회가 됐습니다.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혁신이 중요한데 아무래도 글로벌시장을 주도하는 혁신의 대명사는 실리콘밸리 아니겠습니까. 미국에서 상무관도 세 번이나 하셨는데 어떻게 보세요.
△안 그래도 요즘 (일본 이케다 준이치가 쓴) ‘왜 모두 미국에서 탄생했을까’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미국에서 정보통신기술(ICT) 주요 기업이 탄생하는 이유를 자유로운 발상을 중요시한 히피 문화에서부터 찾더라고요. 한국공학한림원 회원들은 “미국 서부 쪽이 연구를 위한 빅데이터 확보에 유리하다”고 답하더군요. 서부 쪽에 이민 2세 출신이 많고, 히스패닉·인도·중국계가 어우러지잖아요. 저출산·고령화 사회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죠. 미국은 요즘에는 동부에도 실리콘앨리라고 해서 금융과 결합한 혁신 기업이 빠르게 늘고 있지요.
-다양성을 강조하셨는데 우리는 다문화나 이민에 익숙하지가 않은 게 현실 아닙니까.
△사실 우리 뿌리도 다양해요. 최근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2020년부터 매년 40만 명의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든다는데 이런 인구절벽과 (생산현장의) 고용절벽 문제를 해결하려면 출산 장려뿐 아니라 해외 인력 유입도 적극 고려해야 합니다.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세계화도 어려워집니다. 이종교배가 활발히 이뤄져야 합니다. 미국은 국가적으로도 멜팅팟(인종의 용광로)인 데다 서부 쪽은 다양성이 더 강하죠.
―최근 창업 활성화와 규제자유구역 설치 등도 강하게 주장하셨습니다. 제조업 고도화와 서비스 융합도 필요하잖아요.
△창업은 단순 일자리 창출 수단이 아니라 산업 전체의 신진대사를 만드는 역할까지 해야 돼요. 규제자유구역은 현재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데, 어느 지역에서나 자유롭게 유통할 수 있는 ‘규제자유기술’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에너지 저장장치 제품 등을 기업이나 공기업이 구매하면 세금감면·보조금 등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죠. IBM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컨설팅으로, GE가 비행기엔진 만들다가 엔진의 문제를 진단하는 소프트웨어 서비스까지 사업을 고도화하잖아요. 우리 기업들도 혁신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ICBM을 강조하고 계시죠.
△네 신산업과 차세대 성장동력을 위한 인프라 핵심기술이기 때문이죠. 요즘 뜨는 드론이나 3D컴퓨터 등은 IoT에 속하고, IT산업 백업은 클라우드, 인공지능 로봇이나 전력 효율화 등은 빅데이터가 각각 뒷받침돼야 하죠. ICBM을 강조하다가 최근에는 보안이 전제돼야 해 요즘은 ICBMS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 서울경제가 최근 국회 포럼에서 강조했던 내용인데요.
△생각이 똑같네요. 잘 짚었어요.(다같이 웃음)
―지난 17일 공학한림원이 주최한 ‘코리아리더스포럼’에서도 산업과 기술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외교안보적으로도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더군요.
△이제 (노동·자본 등) 요소투입만으로는 성장동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요. 지식·서비스를 연결해야 하고 경제·산업·기술 혁신을 넘어 사회가 총체적으로 새 패러다임을 짜야 합니다. ICBMS로 우리 경제를 일신하고 산업화·민주화 과정에서 우리가 놓쳤던 가치를 살려 각 분야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죠.
-한 단계 더 도약해 경쟁력을 갖추고 선진사회로 가려면 어떤 점을 갖춰야 한다고 보십니까.
△서구의 산업화 과정을 압축하다 보니 우리는 여러 과정을 생략했어요. 걷다가 자전거를 타고, 오토바이를 타다가 자동차를 타야 하는데 우리는 오토바이 과정을 건너뛴 셈이죠. 산업화와 민주화를 잘 성취했음에도 왜 현시점에서 성장에 발목을 잡혔을까요. 이명박정부에서 일어난 촛불시위, 이번 정부에 발생한 세월호·메르스 사태 등 계속 위기가 나타나는데요. 우리의 대처 모습을 보면 아직도 산업화·민주화를 이룬 성공의 덫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요. 과거 패러다임은 우리 사회 전체가 이제 털어 버리고 성공의 위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산업화·민주화 성취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한 것이 무엇이죠. 총체적으로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미국은 (잘 형성된) 커뮤니티가 있었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토론하고 결론을 끌어냅니다. 유럽도 시민세력이 귀족에 대항하면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왔잖아요. 반면 우리는 동학 민중봉기나 갑오경장이 실패하는 등 그런 과정을 거의 거치지 못했죠. 근로자의 대변인이었던 노조는 이제 하나의 직업군이 됐고, 시민단체도 일부 그런 부분이 있고, 진리·정의를 탐구해야 할 학교도 등록금을 받아 사업에 치중하고 있어요. 정치도 세력이 이익집단으로 변질됐어요. 산업화·민주화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맡았던 주체가 지금은 이익집단으로 변질돼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급부상하며 우리를 추월하고 있어 공중증(恐中症)마저 느껴진다는 지적도 적지 않은데요.
△물론 중국 무섭죠. 큰 시장과 풍부한 자원을 앞세워 서구의 산업화 100년을 20년 만에 따라잡는 분위기이니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넛크래커(Nut-cracker)’ 신세라고 지적하죠. 하지만 역사적으로 한국이 안 그랬던 시절이 있었나요. 우리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일본이라는 기술 선진국, 중국이라는 큰 시장이 옆에 있던 덕분이에요. 오히려 행운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을 잘 활용해야죠.
―하지만 중국 텐센트만 예를 들어도 당초 우리 게임을 수입하다가 이제는 기술 빼가기, 인력 빼가기, 한국회사에 대한 대규모 투자에 이어 이제는 게임 유통 최대 강자로 군림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 수출도 많이 하죠. 이런데 중국굴기가 과연 상호 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나요.
△무역협회와 KOTRA 시절부터 중국을 유심히 봤는데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죠.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에서 ‘메이드 위드 차이나(Mde with china)’로 나아가야 해요. 게임을 예로 들면 활용할 수 있는 중국의 고전 콘텐츠가 얼마나 많아요. 여기에 우리의 개발 기술력을 더하면 13억 인구 시장도 얼마든지 공략할 수 있죠. 중국과 함께 할 수 있는 혁신을 능동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꽌시(인맥)’를 만들어요. 얄팍한 상술이 아니라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을 잘 활용하면 윈윈할 수 있습니다.
―초당적으로 중장기 미래전략을 짜는 국가미래전략원 신설도 강조하셨죠.
△5년 대통령 단임제에서 중자익 국가 과제를 다루기 어려워요. 정치로부터 좀 자유롭고 중립적인 미래전략기구가 필요합니다. 국회에 두자는 의견도 있는데 자칫 정파 싸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어 반관반민으로 외부에 설치해서 정부는 재원 마련과 전문가 모집까지만 담당하고, 그 이후에는 정치·정부와 별개의 기구로 운영했으면 합니다.
/정리=윤경환기자 ykh22@sed.co.kr 사진=송은석 기자
“아이비리그, 한국보다 中·印 학생 선호... 공학교육 근본 개선 필요”
“(미국 교수들이) 중국·인도에서 온 학생은 함께 토의하고 아이디어도 주고받는 ‘파트너’로 인식하는 반면, 한국 학생은 테크니션(보조 기술자)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더라고요.”
오영호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얼마 전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아이비리그(미국 북동부의 명문 사립대 그룹) 교수와 대화를 나누다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비리그 석·박사 과정에 우리나라와 중국, 인도 학생이 동시에 지원할 경우 중국·인도 학생들을 더 선호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 회장이 이유를 따져 묻자 이 교수는 ‘한국 지원자는 전문지식과 영어·수학 미적분 능력이 떨어지고, 의지와 열정도 부족하다’는 답을 내놨다. 중국·인도 지원자는 웬만한 컴퓨팅 기술과 코딩을 갖추고 곧바로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영어를 하고 영주권을 받으려고 열심히 하지만 한국 학생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 ‘미국에서 학위 받아 한국으로 돌아가 취직이나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한국 지원자가 많다는 말도 했다. 오 회장은 “사실 확인을 위해 귀국하자마자 국내 교수 몇 명에게 물었는데, ‘(아이비리그 입학을 위해) 추천서 써달라는 제자들 수가 정말 줄어 들었다’고 말하더라”며 “미국 교수의 사견만은 아닌 것 같아 씁쓸했다”고 털어놨다.
오 회장은 ‘한국 출신 비선호 현상’이 단순히 최근 추세만이 아닐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 공학 인재의 경쟁력 약화 현상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징후라는 설명이다. 오 회장은 근본 원인으로 시대에 뒤쳐진 공학교육을 꼽았다. 실제 공학한림원이 최근 교수·학생·산업체 종사자 등 7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우리 공학교육에서 가장 개선할 부분으로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실무능력 배양’(58.8%)이 꼽혔다. ‘전공 심화교육’(21.7%)과 ‘글로벌 역량’(6.7%)이 뒤를 이었다. 전문지식과 외국어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들어맞는 대목이다. 오 회장은 “교육부와 협의해 내년에 전반적인 (공학교육) 실태조사를 해보려고 한다”며 “폭넓은 조사를 바탕으로 공학교육의 문제점을 속까지 훑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공학 인재 육성은 한국의 핵심 미래 전략이라는 것이 오 회장의 지론이다. 그는 “공학교육 콘텐츠를 개방해 공학교육을 혁신하고, 창의·융합형 인재 배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이민제도를 개선해 해외 우수인력을 국내로 끌어들이는 데 힘쓰는 일도 필수”라고 강조했다. /조양준기자 mryesandno@sed.co.kr
오영호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오영호 한국공학한림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