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권사들이 최근 해외 부동산 거래의 주요 '플레이어'로 부상하고 있다. 두둑한 자기자본을 활용해 해외 부동산을 매입(총액 인수)한 뒤 연기금·공제회 등 국내 기관투자가에 이를 재매각하는 방식이다. 증권사가 기존 주식(증자·상장) 및 채권에 국한돼 있던 총액인수 대상을 부동산 등으로 확대하면서 투자은행(IB)의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21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한국투자증권과 FG자산운용을 비롯한 국내 기관들은 호주 수도 캔버라에 위치한 '루이살로손' 빌딩을 약 2,070억원에 인수할 예정이다. 전체 인수 자금 중 1,170억원은 현지 대출로 조달하며 나머지 900억원은 한국투자증권이 우선 총액 인수한 후 연기금·공제회·보험사 등 국내 주요 투자자들에 재매각(Sell Down)할 계획이다. 이 빌딩은 호주 복지사업부가 지난 2013년부터 18년 동안 장기 임차 계약을 맺고 있으며 지상 5층, 연면적 2만5,700㎡ 규모다.
금융지주 계열의 국내 증권사 3곳도 한국투자신탁운용과 함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국세청(IRS) 빌딩 인수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세 증권사는 4,000억원 안팎인 빌딩 매입 대금 중 현지 대출분(2,000억원안팎)을 제외한 총 1,800억원을 총액인수 방식으로 부담했다. 이들 1,800억원 투자분을 국내 주요 투자자들에게 재매각할 방침이다.
해외 부동산 투자에서 국내 증권사들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은 빠른 의사결정이다. 현재 주요 해외 부동산시장은 매도자(Seller) 우위 구조다. 거래 일정이 매우 빡빡하게 진행되는 해외 부동산 거래의 경우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 실사 및 잔금 납입(딜 클로징)까지 통상 45일 정도의 시한이 주어진다. 그러나 국내 자산운용사가 연기금·공제회 등 투자자를 대상으로 자본을 조달할 때는 평균 2개월 이상 소요돼 이 '거래 데드라인'을 맞추기 어렵다. 국내 운용사 중 별도의 외부 펀딩 없이 곧장 '실탄'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부동산 블라인드 펀드(펀드 설립 후 투자 대상을 고르는 펀드)를 보유한 곳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중국·중동 자본의 경우 빠르면 2주 안에 자금을 전액 지불하는 탓에 해외 시장에서 이들과 경쟁하기 쉽지 않다"며 "풍부한 자기자본을 토대로 신속하게 투자 확약을 해줄 수 있는 국내 증권사들에 대한 필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해외 부동산 인수 구조가 기존 자산운용사-국내 기관의 '2각 체제'에서 운용사-증권사-국내 기관의 '3각 편대'로 바뀌면서 오히려 투자 안정성은 높아지는 추세다. 타인 자본을 토대로 펀드를 조성해 해외 부동산을 매입하는 자산운용사와 달리 100% 자기 자본을 활용해 물건을 사들이는 증권사는 인수 이후 재매각에 실패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이른바 '실권주 리스크'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꼼꼼하게 투자 구조를 검토할 수밖에 없다. 즉 거래 구조상 마지막에 투자를 검토하는 연기금·공제회 등 국내 기관 입장에서는 '이미 운용사·증권사에서 두 번이나 투자 검토를 거친' 검증된 물건을 받아볼 수 있는 셈이다.
연기금의 한 고위관계자는 "인력·경험·네트워크 등의 측면에서 국내 증권사의 해외 부동산 투자 역량은 아직 미흡한 게 사실"이라면서도 "국내 증권사들이 2조~3조원에 달하는 자기자본을 활용해 총액인수 대상을 기존 주식·채권에서 부동산 등 대체투자 자산으로 확대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흐름"이라고 평가했다. /박준석·고병기기자 pjs@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