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5월10일] 대륙횡단철도

월드컵 승전보가 1년 내내 전해진다고 치자. 넘치는 기쁨 속에 갈등의 봉합이 가능하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가 그랬다. 완공 1년 전부터 신문들은 1면 머리기사를 두 철도회사의 건설 경쟁으로 채웠다. 동쪽과 서쪽 끝에서 뻗기 시작한 두 개의 철로가 본격 시공 4년 만인 1869년 5월10일 유타주 프라먼토리 포인트에서 만났을 때 곳곳에서 축포가 터졌다. 남북전쟁으로 갈라졌던 나라도 하나가 됐다.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싸웠던 사람들이 철도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 과실에 대한 기대감. 노동자들이 선로를 닦으면 바로 기관차가 자재와 이주민을 실어 날랐다. 정비공장과 터미널, 음식점과 호텔도 생겼다.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은 인근 도시를 연결하는 지역철도를 깔았다. 철로 옆에는 최첨단 통신수단인 전신주가 가설됐다. 사람과 물류 인프라, 통신혁명의 3박자는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 역마차로 한달, 남미 남단을 배로 돌면 6개월이 걸리던 동부와 서부의 거리가 엿새로 줄자 화물ㆍ여객 운임도 10분의1로 낮아졌다. 대륙횡단철도 완공 이후 40년간 미국 제조업의 덩치는 3.5배 커졌다. 국민총생산도 4배로 늘어났다. 철도 총연장은 물론 경제규모에서 유럽을 능가한 미국은 당당하게 국제무대에 나섰다. 세계경제의 흐름도 미국으로 넘어왔다. 미국의 영광 뒤에는 중국인 노동자의 애환이 깔려 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장이던 스탠퍼드(스탠퍼드대학 설립자)가 ‘인종 쓰레기’라고 혹평했다가 ‘성실하고 근면한 민족’이라고 정정했던 1만명의 중국인 노동자 ‘쿨리(苦力)’들은 최대 난공사 구간을 도맡았다. 스탠퍼드는 ‘중국인 50만명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며 이들을 치켜세웠지만 정작 돌아온 것은 1882년의 ‘중국인 배척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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