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영국 북요크셔 지역의 레드카제철소가 공장 폐쇄를 결정했다. 영국 코러스철강과 인도 타타그룹, 태국 사하위리야스틸산업(SSI)으로 주인이 몇 차례 바뀌기는 했지만 지난 100년간 운영되며 유럽의 철강산업을 이끌어오던 공장이었다. 자존심이라 할 만했다. 근로자 1,700명은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게 됐다. 이 같은 파국을 맞기까지 영국 정부는 SSI의 자금지원 요청을 거절하는 등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영국 기업혁신기술부(BIS)는 이와 관련해 21일(현지시간) 보고서를 통해 "다른 유럽 국가들이 중국산 철강에 대한 세이프가드 조치 등을 강구할 때 영국은 업계의 경고를 무시하기만 했다"고 지적했다.
값싼 중국산의 물량 공세로 비슷한 위기에 몰린 국내 철강·석유화학 업계에서도 공감을 얻을 만한 이야기다.
포스코경영연구원에 따르면 중국의 철강 생산은 2000년 이후 연평균 15.4%씩 늘고 있다. 올 상반기 우리나라의 철강 수출은 전년보다 0.2% 줄어든 반면 중국의 수출은 28% 급증했다. 중국의 과잉생산은 수요와 생산설비의 불균형으로도 확인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3년 세계 철강 수요는 16억4,800만톤이었지만 명목설비는 5억1,600만톤이나 많은 21억6,400만톤이었다.
세계의 철강 시장이었던 중국이 거꾸로 물량을 밀어내면서 국내 철강 업체들도 위기에 빠졌다. 대표 주자인 포스코는 올 3·4분기에 6,58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보다 2조원 이상 줄어 13조9,960억원을, 영업이익은 2,000억원 이상 감소한 6,520억원에 그쳤다.
석유화학 업계 역시 공급과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중국의 주요 석유화학제품 자급률은 2010년 65%에서 지난해 79%로 늘어났다. 수입은 연평균 11% 늘어난 반면 수출은 연평균 20%로 더 빠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은 제품이 폴리에스테르섬유, 페트(PET), 필름·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의 주원료인 고순도 테레프탈산(PTA)이다. 국내 PTA 생산량은 2012년 619만톤에서 지난해 534만톤, 올해 상반기 257만톤 등으로 계속 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공세와 수요 감소로 인해 공급과잉 규모가 지난해 268만톤, 올해 상반기 127만톤에 달했다. 이 때문에 SK유화는 PTA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했다. 롯데케미칼 역시 생산라인 전환을 진행하고 있다.
정부는 철강·석유화학 업계의 공급과잉 해소를 지원하기 위해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 제정에 나섰지만 9일 정기국회 처리가 무산되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원샷법은 과잉공급 업종에서 선제적 사업 재편에 나서는 기업에 금융·세제 혜택을 지원하는 법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일본이 산업경쟁력강화법으로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여가는 상황에서 우리만 뒤처질 수는 없다"며 "원샷법을 통해 기업들의 사업 재편을 도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은 지난해 초부터 시행된 산업경쟁력강화법에 따라 석유정제 기업이 총 13개에서 현재 8개로 줄었다.
물론 업계의 자구 노력도 중요하다. 일본·유럽의 주요 화학 기업들은 경쟁력이 뒤떨어진 생산설비를 정리하고 전략적 인수합병(M&A)을 통해 고부가가치 사업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일본 미쓰비시화학의 경우 나프타 분해설비 등 노후설비를 폐쇄하고 탄소소재·정보전자소재·연료전지·헬스케어 등의 사업 비중을 높이는 데 성공한 바 있다. 국내 화학·철강 업계 역시 M&A와 사업 재편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사업 고부가화의 측면에서는 아직 초기 단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주희기자 ginger@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