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커튼뒤 숨어있던 외국계 증권사

최형욱 기자 <증권부>

“황당한 일이다. 증권사 직원이 고객 돈을 횡령한 것은 가끔 봤어도 주식을 빼돌린 사건은 처음 들어본다. 금융비리 자체보다 출고 확인 등 내부 통제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증권사가 더 문제다.” 최근 네덜란드계 ABN암로증권의 직원 2명이 고객이 맡긴 84억원대의 주식을 빼돌린 사건에 대해 국내 증권사의 한 고위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일”이라고 밝혔다. 시장에서 외국계 증권사의 입김은 막강하다. 외국인투자가들의 주요 매매창구로 자리매김하면서 종목 주가는 물론 시장의 흐름까지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국내 증권사에서 외국계로 자리를 옮긴 한 애널리스트는 “과거에는 대기업 탐방 때 찬밥 신세였으나 요즘은 칙사 대접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외국계 주최의 기업설명회(IR)에는 기라성 같은 최고경영자(CEO)들이 만사를 제치고 직접 참석할 정도다. 한 대기업의 IR 담당자는 “주최측이 관례와는 달리 참가비를 떠넘겨도 ‘매도’ 보고서 한번 내면 주가가 출렁거리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실토했다. 이러다 보니 국내 증권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해프닝이 수시로 벌어진다. 외국계 증권사가 특정 종목에 대해 ‘매수’ 추천 보고서를 내면 그때부터 해당 창구에서는 ‘팔자’ 주문이 쏟아지기도 한다. 10명 안팎의 리서치 센터 인력 탓인지 함량 미달의 보고서를 내 시장의 빈축을 사는 것은 비일비재하다. 외국계 근무 경험이 있는 한 애널리스트는 “외환위기 이후 국내 증권사는 갈수록 투명해지는 반면 외국계는 한국시장이나 감독 당국을 우습게 보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고 말했다. 아직도 ABN암로측은 직원들이 빼돌린 주식의 원상복구 여부에 대해 명확한 입장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이번 사고는 과대포장된 외국계 증권사의 실상이 세상에 밝혀진 작은 결과다.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외국계 증권사의 도덕성이나 실력이 진짜 검증됐는가. 그들은 항상 커튼 뒤에 숨어 있었다”라는 원초적인 의구심마저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과거 ‘외국인 따라하기’ 투자 전략이 유행할 때 작전 세력은 외국계 창구를 통해 주가조작을 시도했을 정도다. 감독당국이 이참에 외국계 증권사에 대해 실태조사에 나선다고 하니 커튼 속에 감춰졌던 진면목이 제대로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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