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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은행연합회장에 낙점된 하영구 전 씨티은행장은 직업이 은행장인 '정통 뱅커'다.
사실 KB 회장직에 도전하기까지도 그의 앞날은 순탄했다. 연초 5연임에 성공한데다 연봉 또한 은행장 중 가장 많아 돈과 명예 모두 모자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하 전 행장의 머릿속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단순히 거대 조직의 수장이 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오랜 세월 고락을 같이 해온 전직 씨티은행 사람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었다. '온라인 뱅킹' 등 금융 환경 변화로만 이유를 대기에는 자신의 역할에 한계를 절절히 실감했다는 뜻이다.
하 전 행장의 측근은 "주변에서는 하 전 행장이 KB 회장이 되고 싶은 마음에 씨티를 그만둔 것으로 보지만 실상 본인은 전직 씨티은행맨들에게 미안함이 컸다"며 "보장된 돈 대신 새로운 물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일하고 싶은 욕구가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비주류의 길'은 또 다른 한계를 안겨줬다.
외국계 은행 출신인 하 전 행장에 대해 KB맨들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사외이사 9표 가운데 3표는 처음부터 내부 인사를 점찍고 있었고, 노조 역시 외부 인사인 자신을 대놓고 멀리했다.
결국 하 전 행장은 자신의 뱅커 생활에서 처음 패배를 맛보았다.
하지만 금융인으로서의 그의 30년 이력을 버리기는 아까웠다.
KB 회장직에서 낙마한 후 금융당국과 금융계에서는 하 전 행장이 지닌 글로벌 경력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했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체결을 성사시키는 데 조력했다.
이는 그가 KB 회장직에서 낙마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종휘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과 조준희 전 기업은행장 등 양강 구도로 흘러가던 인선의 흐름을 단숨에 바꿔놓았다.
역전의 돌풍을 일으킨 하 전 행장의 저력은 역시 '관록'이다. '직업이 행장'이라는 별명이 있는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추진력으로 30여년의 은행 생활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4년간 행장직을 수행했다. 그만큼 우리나라 금융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외국계 은행에서 쌓은 글로벌 금융 감각도 강점이다. 한국씨티은행이 디지털 뱅킹의 발달로 오프라인 지점 고객이 크게 줄어든다는 점을 내세워 상반기 650여명의 희망퇴직과 56곳 지점을 폐쇄했다. 이를 두고 금융계에서는 "속도의 문제일 뿐 방향성은 맞다고 본다"며 그의 행보에 공감을 표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하 내정자도 KB금융지주 회장에 출사표를 던질 당시 "30년간 뱅커로서 쌓은 노하우를 펼쳐보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업계와 정부·정치권을 잇는 협회장의 업무적 특성을 고려할 때 그의 화려한 인맥도 강점이다.
하 전 행장은 한미은행장 출신 신동빈 전 회장 퇴임 이후 11년 만에 탄생한 역대 세 번째 순수 민간 출신 은행연합회장이다. 지금까지 은행연합회를 거쳐 간 회장 10명 가운데 8명은 모두 한국은행이나 재경부 출신 관피아가 차지했다.
/박해욱·박윤선 기자 spooky@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