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주사는 최종영 대법원장지명자의 애칭이다. 법원살림을 맡고있던 법원행정처장시절 철저히 원칙을 지키며 깐깐하게 업무를 챙겼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당시 법원행정처 예산담당자들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고 한다. 예산내역서를 올리면 몇만원 심지어 천원 단위까지 용처를 캐묻고 대충 예산을 짜갔다간 「1원이라도 깍으라」고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는 후문이다.
그는 또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관용차(그랜저)를 오토로 바꿔달라는 건의를 한 적도 있었지만 예산상 우선순위가 아니다며 가차없이 반려하기도 했다.
이런 「崔주사」이기에 그의 대법원장 지명에 대해 사법부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에게는 「원칙론자」, 「호인」, 「온건·합리주의자」, 「법관이자 탁월한 행정가」, 「까다로운 상관」등 여러 평가가 엇갈리지지만 「사법개혁을 실천력있게 추진할 인물」이라는데는 별이견이 없다.
사법개혁의 산파역으로서 崔지명자가 남긴 일화는 유명하다. 지난 95년10월 이홍구(李洪九)당시총리와 일전을 벌인 일화는 법조계 안팎에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 李총리는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로스쿨이 도입돼야하고 이를위해 국립법률전문대학원육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는 과정에서 사법연수원의 교육과정을 문제삼았다.
그러자 崔지명자가 법원행정처장으로서 즉각 반격을 가했다. 『총리가 「사법연수원이 교육기관이냐」고 운운한 것에 심히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을 내고 일전을 불사한 것. 결국 일선법원 판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崔지명자는 결국 李총리의 사과를 받아내 사태의 확전을 막았다.
영장실질심사제와 기소전보석제도등 현행 형사소송법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崔지명자가 들인 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때도 검찰과 마찰기류가 없지않았지만 법무부가 입법을 하도록하면서 대법원이 적절히 관여하는 형식으로 마찰소지를 줄여 나갔다. 서슬퍼런 유신정권하였던 지난 74년 당시 김대중(金大中)대통령후보의 선거법위반 사건당시 법관기피신청을 받아들였던 결정은 원칙론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金후보의 신청은 하급법원에서 모두 기각되고 항고·재항고끝에 대법원 제2부가 심리미진을 이유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는데 당시 서울고법 형사1부의 배석판사였던 崔지명자는 기피신청중 일부를 받아들였고 결국 이 사건은 다른 재판부에서 심리를 받게됐다.
그는 지난해 여성단체연합회가 선정한 「여성권익 발전의 디딤돌」로 선정되기도했다. 이유는 98년2월 우조교 성희롱 사건 상고심의 주심을 맡아 원고패소 원심을 깨면서 성희롱의 범위를 명확히 가름짓고 우조교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
이밖에도 의료과실 사건에서 환자의 입증책임을 충분히 고려해 배상을 명한 판결등 법률적 약자의 편에 서서 내린 판결이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장인이 호남출신인 고(故) 고재호(高在鎬)대법관이어서 친호남계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를 잘아는 법조인들은 崔지명자가 『지방색을 드러내거나 편견에 치우쳐 있지 않다』며 기우라고 일축했다.
윤종열기자YJYU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