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내줄 돈이 없었다. 재정이 최악이었던 탓이다. 미국 경제사의 이면을 다룬 존 스틸 고든의 ‘부의 제국’에 따르면 전쟁 직전인 1860년 연방 정부의 채무는 6,484만 4,000달러로 사상 최고에 이르렀다. 경제사가인 찰스 킨들버거가 평가한 대로 ‘미국과 유럽이 공유한 최초의 국제 공황’인 1857년 공황의 여파로 연방 정부의 호주머니가 마를 대로 말랐다.
재정고갈 상태에서 터진 남북전쟁도 돈을 하마처럼 삼켰다. 전쟁 전까지 연방정부 전체의 지출이 하루 17만 달러를 약간 웃돌았으나 전쟁에 돌입한 뒤부터는 전쟁성 한 곳에서만 매일같이 150만 달러를 썼다. 돈도 없을 뿐 아니라 전쟁 중인 연방정부(북부)에 부채를 금으로 상환하라는 요구는 사실상의 적대행위였다.
북부의 일원인 뉴욕주의 은행들은 왜 링컨에게 압박을 가했을까. 국제 금융자본과 손잡고 연방의 두 가지 정책을 뒤엎으려는 속셈이 깔려 있었다. 첫째는 관세법 철폐. 남부주들이 연방을 탈퇴하자마자 제정한 ‘모릴 관세법’으로 고율 관세를 물게 된 영국 무역상인들이 금융업자들을 내세웠다. 두 번째로 불태환 지폐인 그린백이 자리 잡기 전에 링컨을 흔들겠다는 의도 역시 없지 않았다.
뉴욕 은행들과 손잡은 국제금융자본의 뒤에는 영국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었다. 당시 최강국인 영국이 세계 경제를 지배하던 근간은 금본위제도와 자유무역. 각국의 금이 영국으로 몰리게 하는 두가지 수단이 북부의 불태환지폐와 보호무역주의로 위협받자 돈줄로 링컨을 압박한 것이다.
베어링과 로스차일드 등 영국계 자본의 전위대였던 뉴욕의 은행가들은 까다로운 대출 조건도 달았다. 연 24~36% 이자를 요구한 것. 링컨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부채도 당당히 금으로 갚았다. 빚에 쪼들리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금융 혁신과 국민들의 성원 덕분이다.
자본가들의 요구를 거부해 대중의 지지를 받은 링컨은 저금리 국채를 발행하고 그린백을 더 찍어내 위기를 넘겼다. 국채 액면가를 낮은 가격으로 쪼개 여유가 많지 않은 일반인들도 매입할 수 있도록 유도한 필라델피아 출신의 은행가인 제이 쿡의 아이디어로 북부는 많은 자금을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었다.
전쟁 초기 남군에게 연전연패하던 상황에서 금융자본과도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링컨은 두 가지 전쟁 모두를 승리로 이끌었다. 쑹훙빈의 ‘화폐 전쟁’에도 링컨의 은행 전쟁과 관련된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화폐전쟁’에 소개된 비스마르크의 진단. “미국 내전(남북전쟁)은 강력한 단일 국가가 아니라 분열된 미국을 원했던 영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일어났다. 링컨의 암살은 금융자본의 심기를 거스르며 그린백을 발행했을 때 이미 결정됐다.”
과연 링컨의 죽음을 음모론적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다. 링컨이 승리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높았다는 점이다. 미국 독립(1776년) 직후 31 대 51이었던 미국 북부와 남부의 소득 격차는 산업화와 서부 개발이 진행되며 남북전쟁 직전에는 100 대 79로 뒤바뀌었다. 역전의 원인은 간단하다. 독립 이후 80여 년 동안 북부의 경제가 3.2배 커지는 동안 남부는 1.5배에 머물렀으니까.
결국 전쟁의 결과는 경제력의 차이에서 갈렸다. 2400여년 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필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강조한 대로 축적된 자본의 힘이 전장의 승패를 결정한 것이다. 링컨의 은행전쟁은 옛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악의를 지닌 금융자본의 꼼수가 통하지 않을 만큼의 경제력과 지도자의 판단력, 결단력의 중요성이 갈수록 절실해지는 세상이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