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9월28일, 영국 남부 페븐지(Pevensey). 노르만디 공작 윌리엄(당시 39세ㆍ프랑스식 이름 기욤)의 8,200여 기병과 궁병ㆍ보병이 700척의 배에서 쏟아져 내렸다. 왜 왔을까. 무력을 통해서라도 왕위 계승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다. 윌리엄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영국 원정군이 폭풍으로 도버해협을 건너지 못하는 동안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또 다른 경쟁자인 노르웨이 국왕이 영국 북부에 상륙한 것. 영국 국왕 해럴드는 노르웨이 침공군을 무찔렀으나 정예병력을 대부분 잃었다. 결국 윌리엄의 군대는 10월 중순 헤이스팅스에서 기진맥진한 해럴드의 영국군을 눌러 승리를 따내고 윌리엄은 크리스마스를 택해 영국 왕에 올랐다. 윌리엄은 저항을 완전 진압한 뒤 앵글로색슨 귀족의 토지를 모두 빼앗아 봉신들에게 내려줬다. 전국적인 인구ㆍ토지 조사 기록인 담긴 '둠스데이북(1087년)'에 따르면 귀족은 전원이 노르만 출신이며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바다를 떠돌던 바이킹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북부에 정착해 프랑스에 완전 동화한 노르만은 영어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어가 통용되는 동안 하층민의 언어로 떨어졌던 영어는 300년의 세월이 지난 뒤 공용어로 복귀했으나 1만여개의 프랑스 어휘를 안게 되고 고대영어와는 문법구조와 어휘가 크게 다른 중세영어가 새로 생겼다. 노르만 정복은 영어발달사뿐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영향을 끼쳤다. 부하들의 충성을 받아내기 위해 토지를 하사한 윌리엄의 선택은 귀족들의 힘을 키웠다. 국왕의 일방적인 세금징세를 거부한다는 대헌장(마그나카르타) 탄생의 씨앗도 이때 뿌려졌다. 프랑스화한 노르만의 정복이 없었다면 현대영어는 독일어와 보다 가까운 형태를 유지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