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80년 가까운 인생을 살면서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세 분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남덕우 박사다. 그는 1968년에 필자가 유학한 스탠퍼드대에 교환교수로 부임했을 때 처음 만났다. 대부분의 교환교수들이 여가로 시간을 보내는 데 반해 그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 등을 청강했다. 유학생을 만나면 공부를 마치고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귀국할 것을 권유하고는 했다.
그가 귀국하기 직전에 필자는 그분 가족을 모시고 3박 4일간의 미국여행을 안내하게 됐다. 여행 중에 조금이라도 좋은 침대를 손아랫사람들에게 양보하는 등 남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그의 인격이 존경스러웠다. 그의 끊임없는 향학열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등이 그가 재무장관으로 발탁된 이유일 것이다.
두 번째는 필자가 총리로 모신 강영훈 박사다. 그는 육군 중장 시절 5·16 군사혁명에 동조하지 않았고 장성끼리의 호화 만찬을 거부해 따돌림을 당할 정도로 강직한 분이었다. 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의 독대가 보다 친밀하고 제약 없는 회담이 될 수 있도록 수석비서관들이 배석하지 않도록 제도화시켰다. 1989년 어느 날 강 전 총리는 필자에게 건설부 차관으로 갈 것을 권유하면서 "공직자는 보직의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보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청렴과 강직, 그리고 나라 사랑이 그를 총리로 발탁하게 된 배경일 것이다. 최근의 총리 청문회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마지막은 30여년 전 북한의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김재익 경제수석이다. 김 수석은 물가안정, 대외개방, 통계의 혁신 등 주요정책 분야별로 군 출신 대통령에 대해 사전 교육을 실시했다. 이와 관련해 김 수석은 당시 통계국장이었던 필자에게 "정확한 정책수립을 위해 통계정보체계의 구축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한 시간 동안 대통령께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통계에 대한 김 수석의 배려에 필자는 감격했다.
우리 경제는 1980년 초에 마이너스 성장, 두 자리 물가상승 등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개방과 안정화를 통한 경제체질의 개선도 지연시킬 수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개방과 안정화를 위해 풀어야 할 과제에 대한 부처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김 수석은 실세 경제 수석임에도 불구하고 부처 장관을 방문해 독대로 설득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철저히 준비한 김 수석이 협상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를 통한 설득으로 1980년대 초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한 김 수석의 지혜가 존경스러웠다. 최근에는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지 않고 목소리만 높이는 정치권의 협상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