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례 죽을 고비 넘긴 '인동초'… 민주화·인권의 상징 사업가 출신…곡절끝 정치 입문 투옥·망명·사형선고등 시련에도 군부 독재와 끝까지 맞서 싸워 4번도전끝에 15대대통령 당선
입력 2009.08.18 18:16:53수정
2009.08.18 18:16:53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화의 상징이자 인권신장의 기수로 우리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납치와 테러, 사형선고와 6년간의 투옥 그리고 10년의 망명, 가택연금 등 온갖 고초 속에서도 김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에 끝까지 맞서 민주화 운동에 매진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국내에서는 대중적인 카리스마와 인기를 얻었으며 세계적으로는 한국의 인권투사로 이름을 떨쳤다.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칭으로 불린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는 전세계인의 가슴에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됐다. 이러한 자산을 바탕으로 그는 네 차례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자신의 지론인 남북화해 정책을 꾸준히 펼쳐 대외적으로도 명성을 드높였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인 지난 2000년 동아시아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남북화해 정책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사업가 출신…우여곡절 끝에 정치 입문=김 전 대통령은 1924년 목포에서 34㎞ 떨어진 작은 외딴섬 하의도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로 이사한 그는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사업을 시작해 크게 성공했다. 23세이던 1948년 그는 목포일보를 인수해 주필을 겸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그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민주당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8개월 만에 탈퇴했다. 이 경력은 후에 김 전 대통령을 둘러싼 ‘색깔론’ 시비의 원인이 됐다.
정치인 김대중의 삶은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부터다. 그러나 그는 네 번이나 고배를 마신 뒤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하지만 당선된 지 사흘 만에 5ㆍ16 쿠데타가 발생해 국회 문턱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의원직을 잃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첫번째 부인인 차용애씨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6대 총선 때 목포에서 당선돼 10년 가까이 제대로 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개원 초기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5시간19분의 본회의 최장 발언 등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던 중 그는 1962년 남은 인생의 반려자이자 동지로 이희호씨를 맞이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70년 당시 김영삼씨와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신민당 대선 후보로 나서 결선투표에서 극적으로 후보로 선출됐다. 1971년 46세의 나이로 박정희 대통령과 승부를 벌인 김 전 대통령은 무수한 부정ㆍ관권 선거 속에서도 95만표라는 근소한 표차이로 패배해 정치력을 과시했다.
◇연금ㆍ투옥ㆍ망명ㆍ사형선고 등 시련=대선 패배 후 김 전 대통령은 약 20년간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유신정권에서 전두환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무려 55차례의 연금생활과 5년 반 동안의 감옥생활, 두 차례의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죽을 고비만도 다섯 차례를 넘겼다. 1971년 테러로 보이는 교통사고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됐고 1972년 유신선포로 일본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1973년 도쿄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돼 바다에 수장될 뻔한 그는 역시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끌려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고도 이어지는 가택연금 생활은 오히려 그를 더욱 강인하게 했고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빛을 더해줄 뿐이었다. 1976년 ‘명동 3ㆍ1 구국선언’으로 구속돼 2년9개월간 복역한 김 전 대통령은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사면복권돼 자유를 잠시 누리다 신군부의 쿠데타로 다시 투옥됐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그는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국제적 여론에 힘입어 목숨을 건진 그는 1982년 석방됐으나 두 번째 망명국인 미국으로 다시 떠나야만 했다. 1985년 2월 군사정권의 위협 속에 귀국한 그는 김포공항에서 곧바로 연행돼 가택연금 생활에 들어갔으나 2ㆍ12 총선을 지원,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직선제 개헌투쟁의 선두에 선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대통령직선제 쟁취 후 대선 출마를 강행해 야권 분열과 함께 민주주의 진영의 패배로 군부통치 종식이라는 국민적 기대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와 3파전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당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1988년 총선 때 ‘황색돌풍’과 함께 재기에 성공한 그는 1992년 다시 대선에 도전, 호남 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200만표 차로 패배했다.
낙선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1월 영국으로 건너가 6개월 동안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낸 후 귀국했으며 1994년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후 아태평화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창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통일연구에 전념하던 중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정치활동을 재개한 뒤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정식으로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1996년 4월11일에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야당의 지위를 굳히자 그는 제15대 대통령선거를 향해 질주, 1997년 11월 충청 지역의 맹주임을 자처하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두 당의 단일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1997년 12월 네 번째 도전 끝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여권 후보의 분열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외환위기를 등에 업고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특히 ‘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김 전 대통령의 당선은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로서 의미가 깊다.
◇외환위기 조기 극복, 한반도 긴장해소 기여=외환위기에 따른 국가부도 위기 속에서 정권을 잡은 김 전 대통령은 비록 2년 만에 환란의 불길은 잡았지만 권위주의적 체제 아래서 고착된 경제구조의 취약성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준비된 대통령’으로서의 빛은 남북관계에서 발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야당과 일부 언론의 무조건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경제개혁에 착수해 지난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한편 기존의 완강한 대북 흡수통일론을 배격하고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견지해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 결과 ‘햇볕정책’을 통해 반세기 동안 닫혔던 북쪽의 문을 열어 2000년 6월13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ㆍ15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긴장의 한반도에 평화의 햇살을 비치게 한 것. 또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하는 데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10월 민주주의와 인권신장 및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21세기 첫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 진보정권 재창출의 토대를 닦았다. 결국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후보가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돼 민주당 집권기간을 연장시켰다. 퇴임 후 김 전 대통령은 꾸준한 강연 활동을 펼치며 남북관계와 정치ㆍ경제ㆍ사회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에 김 전 대통령은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며 애통해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노 전 대통령의 부인인 권양숙 여사의 손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모습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