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시계업체들의 각양각색 스마트워치 대응법

본격 승부수냐 한 다리 걸치기냐

<이 콘텐츠는 FORTUNE KOREA 2016년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스와치그룹으로 대표되는 전통의 거대 시계제조업체들이 하위 브랜드를 통해 잇따라 스마트워치를 내놓고 있다. 이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마트워치를 두고 “쓸모도 없고 가치도 없는 전자기기일 뿐”이라며 혹평했던 곳이기에 현재 상황은 대단히 의외로 느껴진다. 시계업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베르나르 아르노(왼쪽) LVMH그룹 회장과 장 클로드 비버 태그호이어 CEO가 태그호이어 커넥티드 스마트워치를 차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11월 9일 출시한 태그호이어의 스마트워치 ‘태그호이어 커넥티드’가 쾌조의 판매 추세를 보이고 있다. 너무 잘 팔리는 나머지 일부 오프라인 판매점에서는 재고를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져 이슈가 되기도 했다. 태그호이어는 이들 판매점의 재고 물량 확보를 위해 2015년 12월부터 태그호이어 커넥티드의 온라인 판매를 일시 중단한 상태다. 이 같은 인기에 태그호이어는 태그호이어 커넥티드의 생산량을 크게 늘려 2015년 12월부터는 주당 2,000개씩 생산하고 있다. 출시 당시 계획한 주당 생산량은 1,200개였다.


태그호이어 커넥티드의 이 같은 인기는 큰 의미를 가진다. 태그호이어 커넥티드를 출시한 태그호이어는 애플이나 삼성전자와 같은 IT기기 제조사가 아니라 1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스위스 명품시계 제조업체이다. 태그호이어는 명품시계 시장에서 가지고 있는 브랜드 가치를 반영해 태그호이어 커넥티드를 1,500달러(약 170만 원)에 출시했다. 애플을 포함한 IT기기 제조업체들의 스마트워치 가격이 주로 30만~50만 원대에 형성돼 있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비싼 가격이다. 현재까지 출시된 스마트워치들이 기능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시장의 평가를 고려하면, 태그호이어는 명품시계 시장에서 가지고 있는 자사의 브랜드 가치를 스마트워치에 투영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연산과 프로그래밍 등 컴퓨터 기능이 탑재된 최초의 손목시계 세이코 ‘UC-2000’

◆ 스마트워치 폄하하다가 태도 바꿔


스마트워치는 해석의 주체에 따라 꽤 포괄적으로 쓰이고 있는 개념이다. 가장 광의의 개념으로는 전자기능이 탑재된 시계를 말하고, 그보다 좁게는 애플리케이션이 탑재된 시계를, 더 좁게는 무선통신 기능을 갖춘 시계를 말한다. 스마트폰 등 스마트기기와 연동되는 스마트워치들은 ‘커넥티드워치’라는 카테고리로 따로 구별하기도 한다.


시계 제조업체 중 가장 먼저 스마트워치 제작에 뛰어든 건 일본의 시계업체 세이코였다. 세이코는 1984년 연산과 프로그래밍 등 컴퓨터 기능이 탑재된 최초의 손목시계 ‘UC-2000’을 출시했다. UC-2000은 메모리 최대치가 24K 램(RAM)이었는데, 당시 수준으로서는 첨단이라 할 만했다. UC-2000에 별도 구성품으로 제공된 전용 키보드를 연결해 프로그래밍하는 모습은 당시 여러 과학잡지에 실릴 만큼 UC-2000은 시대를 앞서간 제품이었다.


1969년 세계 최초의 상업용 쿼츠 손목시계 아스트론을 출시하며 세계 시계시장의 큰 흐름을 바꾼 세이코였지만, UC-2000의 대중화에는 실패하고 만다. UC-2000은 이후 더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세이코의 실패 이후 시계업계에서는 컴퓨터의 기능을 갖춘 시계, 즉 스마트워치 개발을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러한 분위기는 2010년대까지도 이어져 태그호이어 커넥티드 개발을 주도한 장 클로드 비버 태그호이어 CEO조차도 과거엔 스마트워치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혹평할 정도였다.


이 같은 분위기가 반전된 건 불과 2년 전인 2014년의 일이다. 변화의 시작은 IT기기 업체들로부터 촉발된 스마트워치 정체성 논란이었다. ‘스마트워치는 시계인가 전자기기인가’를 주제로 2014년 세계가전전시회(IFA·Internationale Funkausstellung)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면서 그간 ‘스마트워치는 시계가 아니다’라고 평가절하하기 바빴던 시계업계의 분위기에도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스마트워치에 대해 독설로 일관했던 닉 하이에크 스와치그룹 CEO와 장 클로드 비버 태그호이어 CEO가 ‘스마트워치 개발에 관심이 있다’ 등의 발언을 쏟아내며 전향적인 태도로 돌아선 것도 이때부터다. 시계업계 일각에서 당시의 스마트워치 정체성 논란을 두고 ‘내심 스마트워치를 개발하고 싶었으나, 그간 해왔던 말이 있어 태도를 바꾸기 어려웠던 시계업체들에게 퇴로를 열어준 사건’으로 해석하는 이유다.



세계 시계산업을 호령하는 빅3 시계업체인 스와치그룹, 리치몬트그룹, LVMH(태그호이어가 속해 있다)그룹은 지난 2015년 각각 하위 브랜드에서 스마트워치를 선보이며 IT기기 업체들이 주도하고 있던 스마트워치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빨리 스마트워치를 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스마트워치 기술이 이미 상당 부분 보편화한 데다 주요 IT기업과의 기술 제휴로 OS 등을 따로 개발할 필요가 없었던 덕분이다. 스와치그룹에서는 스와치가, 리치몬트그룹에서는 몽블랑이, LVMH그룹에서는 태그호이어가 선봉에 섰다.
태그호이어 ‘태그호이어 커넥티드’

◆ ‘태그호이어 커넥티드’ 돌풍


시계 제조업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스마트워치에 접근하고 있다. 지난해 시계 전문 제조업체들이 시장에 내놓은 스마트워치는 업체별로 큰 차이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리치몬트그룹의 몽블랑은 2015년 1월 열린 국제고급시계박람회(SIHH)에서 명품시계 브랜드로는 최초로 커넥티드 계열의 스마트워치 ‘타임워커 어반 스피드 e-스트랩(이하 e-스트랩)’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e-스트랩은 시계 본체는 기계식 시계로 구성하되 스트랩(시곗줄)에 스마트 기능을 넣어 기계식 시계의 매력과 스마트워치의 장점을 동시에 갖춘 시계로 평가받았다. 몽블랑은 e-스트랩의 스트랩에 0.9인치의 흑백 LED를 탑재해 활동량 측정이나 알림 등의 스마트 기능을 수행케 했다.


스와치그룹은 2015년 9월 스와치 브랜드를 통해 ‘터치 제로 원’을 선보였다. 스와치그룹의 터치 제로 원 출시는 두 가지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리치몬트그룹과는 달리 저가 브랜드인 스와치 브랜드를 통해 스마트워치를 내놓았다는 점과 스마트워치의 기능이 피트니스로 제한됐다는 점이다. 시계업계에서는 ‘20만 원 안쪽의 가격대로 제품을 론칭하려다 보니 출시 브랜드와 탑재 기능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스와치그룹은 2015년 11월 결제 기능을 첨가한 스마트워치 ‘벨라미’를 2016년 안으로 론칭한다는 계획을 밝혀 주목을 받기도 했다. 벨라미는 이미 개발이 완료돼 출시만 앞둔 상태다. 아직 전체 기능과 가격대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벨라미 역시 스와치 브랜드로 출시되는 만큼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와 특정 분야(결제)에 특화된 기능을 갖출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스와치그룹은 이보다 앞선 2015년 3월 바젤월드에서 스와치보다 고가인 티쏘 브랜드를 통해 스마트 & 트렌디 워치를 콘셉트로 ‘티-터치 엑스퍼트 쏠라’를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이 시계는 비교적 다양한 기능을 갖췄음에도 이들 기능이 기존의 기계식 시계 위주로 구성된 데다 스마트 기기와 연동이 안 된다는 점 때문에 스와치그룹 내에서도 스마트워치보다는 기능성 시계로 분류되는 분위기다.


LVMH그룹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15년 11월 태그호이어 브랜드를 통해 론칭한 태그호이어 커넥티드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LVMH그룹의 태그호이어 커넥티드가 리치몬트그룹의 e-스트랩(스트랩에 스마트 기능을 장착)이나 스와치그룹의 터치 제로 원(특정 스마트 기능에 집중)과 구별되는 점은 기능이나 형태 면에서 IT기기 제조사들의 스마트워치 성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 소비자들이 머리에 떠올리는 스마트워치에 가장 부합하는 모델인 셈이다.


하지만 태그호이어 커넥티드는 판매 조건에서 IT기기 제조사들의 스마트워치와 큰 차이를 보인다. LVMH그룹은 태그호이어 커넥티드에 일반 스마트워치의 3~4배에 달하는 가격(1,500달러)을 책정하면서 2년 후 1,500달러를 더 내면 태그호이어의 기계식 시계 모델인 ‘까레라’로 바꿔준다는 옵션을 달았다. IT기기로서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는 2년 후에 감가상각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명품 기계식 시계로 전환해주겠다는 것이다. 많은 업계 관계자들은 이 판매 조건이 태그호이어 커넥티드의 인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한다.
몽블랑 ‘타임워커 어반 스피드 e-스트랩’

◆ ‘대세’ 형성할지는 아직 미지수


시계업계는 2016년에도 시계 전문 제조업체들의 스마트워치 출시가 꾸준히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이들의 스마트워치 출시가 과거 쿼츠시계의 등장 때처럼 시계업계의 대세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시계이야기’의 저자이자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 한국 전시회 오거나이저인 정희경 매뉴얼세븐 대표는 말한다. “시계업체들, 그중에서도 명품시계업체들의 스마트워치 시장 진출은 당연한 수순이 될 것 같습니다. 명품시계업체들은 항상 첨단 기술을 계속 받아들이면서 발전해왔거든요. 태그호이어 커텍티드 출시 행사에 베르나르 아르노 LVMH그룹 회장이 참석한 걸 보면, LVMH그룹 산하의 다른 명품 시계 브랜드들도 같은 길을 걸을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일부 하이엔드급 브랜드들은 차별화된 길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엔 어떤 식으로든 스마트워치에 한 다리를 걸치는 형태로 갈 것 같습니다.”


‘시계, 남자를 말하다’의 저자인 이은경 몽트르 코리아(프랑스계 시계 전문잡지 몽트르의 한국어판) 편집장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여러 시계 브랜드가 스마트워치 제작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계업계 전체로 보면 적극적으로 나서는 곳은 얼마 없을 것으로 예상해요. 특히 하이엔드급 시계 브랜드의 스마트워치 시장 진출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이들 명품시계업체의 고객들과 스마트워치 시장의 고객들은 성격이 전혀 다르거든요. 고객층이 서로 다르단 말이죠. 겹치는 소비자층이 거의 없어서 시장 간 간섭효과도 적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스와치 ‘벨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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