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저물어가는 '월가의 전설시대'


세월의 무게는 그 누구도 못 이기는 것일까.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84)의 명성이 흔들리고 있다. 버핏이 회장으로 있는 버크셔해서웨이 주가는 2008년 이후 최악의 하락세를 보였다. 더구나 그는 인수한 기업의 단기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감원·공장폐쇄 등 이전에 쓰지 않던 구조조정 기법을 사용해 비난을 받고 있다. 자회사인 한 주택건설업체는 저소득층에 과도한 수수료를 부과해 당국 조사까지 받으며 도덕성에 흠집을 남겼다.

그나마 버핏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지난해 '채권왕' 빌 그로스(71)는 자신이 세운 세계 최대 채권 운용사인 핌코에서 해고돼 43년 만에 불명예스럽게 떠나야 했다. 자리를 옮긴 야누스캐피털에서도 마이너스 수익률에 자금이 속속 빠져나가고 있다. 핌코를 떠날 당시 "앞으로 40년은 더 일할 준비가 돼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월가 전설들의 일선 후퇴가 진행 중이다. '신흥국 투자의 황제'인 마크 모비우스(78)는 지난 7월 템플턴이머징마켓그룹의 수석 매니저 지위를 넘기고 회장직만 맡기로 했다. 2013년 그는 "투자는 와인처럼 오래될수록 더 좋아진다"며 자신감을 나타냈지만 신흥국 경기둔화에 따른 수익률 하락과 투자가 이탈에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물론 '헤지펀드의 제왕' 조지 소로스(85)나 '기업 사냥꾼'인 칼 아이칸(79) 등은 아직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마저 퇴장할 경우 앞으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물들의 시대는 다시 오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신(新) 채권왕'인 제프리 건들락 등 일부 신성이 부상 중이지만 '역대 최고의 펀드매니저'인 피터 린치, '정크본드의 제왕' 마이클 밀컨, '투자의 전설' 빌 밀러 등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진다.

'스타 투자가' 시대의 종말은 금융시장의 복잡화·대형화 때문이다. 직관이나 혜안을 가진 개인의 투자 비결보다는 금융공학을 전공한 '월가 풋내기'들의 정교한 시스템이 더 중요해졌다. 투자가들도 개인 펀드매니저보다는 인덱스펀드나 장내거래펀드에 돈을 넣어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투자 위험을 줄이는 추세다. 그로스도 "나는 물론 버핏·소로스 모두 금본위제가 사라지고 엄청난 자금이 유입되던 때 활동했기 때문에 돈을 벌었다"며 "현존하는 채권왕·주식왕·투자왕은 없다"고 단언할 정도다.

하지만 금융시장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우상들이 활보하던 시대를 그리워하는 투자가들도 많다. 투자의 나침반이 사라지면서 각자도생의 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권도 과거 국가 위기 때와 달리 강력한 리더십과 비전, 도덕성과 희생정신을 갖춘 정치가는 보이지 않고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부동산 재벌인 도널드 트럼프 등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대권을 다투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과거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끈 리더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국가적 이익보다는 정파적 이익과 과거 향수에만 몰두하는 정치인들이 넘쳐난다. 재벌 2세들은 신성장 동력 발굴은커녕 수성조차 버거워하고 있다. 물론 그로스의 표현대로 사람이 위대한 시대를 만든 게 아니라 시대가 위인을 만들 수도 있다.

또 한국 사회가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강력한 힘을 가진 영웅이나 일사불란한 사회 동원력보다는 정교한 위기관리, 이해집단 간 갈등 중재와 포용, 미세한 부문의 개혁 능력이 더 중요한 시점이 됐다. 하지만 새 시대에 걸맞은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도 나타나지를 않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시행착오와 혼란을 겪어야 근대화와 민주화라는 과거 시대정신을 뛰어넘는 리더가 나타날 수 있을까.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이 역동성을 잃고 말라가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연초부터 드는 푸념이다.

/최형욱 뉴욕 특파원 choihu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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