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 '디플레 방어' 배수진

"제로 금리로 안되면… 장기 국채 매입도 고려할만"
금리정책으론 한계…양적완화정책 예고
NBER "작년 12월부터 침체 진입" 선언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최악의 경기침체 시나리오인 디플레이션(Deflation) 방어를 위해 배수진을 쳤다. 현재 1%인 기준금리를 제로로 낮춰도 경기회복이 더디고 자금경색이 해소되지 않으면 일본의 디플레이션 방어 모델인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정책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일본중앙은행(BOJ)은 지난 2000년대 초 ‘제로 금리’를 유지해도 극심한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지 못하자 양적완화정책을 도입, 은행 보유 장기 국채를 매입하는 방법으로 금융권에 ‘돈의 홍수’를 일으킨 바 있다. 버냉키 의장은 1일(현지시간)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린 기업 대표자 회의 연설에서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하는 것이 확실히 실행 가능한 일이지만 현시점에서 전통적인 금리정책을 통한 경기회복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버냉키 의장은 이어 “경기가 앞으로 둔화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금리는 0%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만큼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한 대안으로 장기 국채 또는 각종 증권을 매입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며 양적완화정책 도입을 예고했다. FRB가 장기물 증권을 인수하면 금융기관의 여유자금이 늘어나 모기지 금리 및 기업과 소비자들의 차입금리가 내려가는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환매조건부로 단기물 국채를 사들여 시중금리를 정책목표 금리에 맞추는 ‘공개시장조작’과 달리 무기한 장기물 국채를 매입하는 양적완화정책은 FRB가 경기를 부양하고 자금시장 경색을 해소할 수 있는 마지막 정책수단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정책은 단기적으로 채권시장을 왜곡하며 장기적으로는 ▦달러 약세 ▦외국인의 미 자산매입 기피 ▦인플레이션 유발 등 적지 않은 부작용도 예상된다. FRB가 양적완화정책을 동원하기는 지난 1950년대 초 이후 처음으로 사실상 달러를 찍어내 무제한 돈을 풀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학자 시절 대공황 및 일본 디플레이션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던 버냉키 의장은 FRB 이사였던 2002년 11월 전미경제학자클럽(NEC) 연설에서 “디플레이션이 경제를 위협하면 FRB는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려대는 것처럼 경제에 돈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밝혔었다. 버냉키는 학자 시절의 소신을 FRB 이사 때는 발언하는 데 그쳤지만 FRB 수장인 현재 ‘디플레이션 파이터’로 실천에 옮기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FRB는 제로 금리 또는 이에 준하는 수준으로 금리를 추가 인하한 뒤 통화 총량을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FRB는 오는 16일 올해 마지막 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어 기준금리를 최소 0.5%포인트 인하할 것으로 전망된다. FRB가 통화정책의 최후 카드를 뽑아 든 것은 기준금리 인하와 대규모 단기 유동성 공급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회복되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는데다 은행끼리만 돈이 돌 뿐 회사채ㆍ소비자 금융시장에는 자금경색이 풀리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경기 사이클을 판정하는 전미경제조사국(NBER)은 이날 미국이 지난해 12월부터 경기침체 국면에 진입했다고 공식 선언, 불황 장기화를 인정했다. NBER는 성명을 통해 “2008년 경제활동 둔화가 경기침체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판정, 2001년 11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73개월간 이어온 경기확장 국면에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 경제가 내년 상반기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갈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어서 경기침체 기간은 최소한 18개월로 1930년 대공황 이후 최장기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최장기 경기침체는 대공황 시절 43개월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1970년대 1차 오일쇼크 때와 1980년대 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기에 각각 16개월이었다.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중앙은행이 하루짜리 초단기 금리인 정책금리를 인하하는 통상적인 금리정책을 포기하고 통화량 자체를 늘림으로써 경기방어와 신용경색을 해소하는 비상정책. 주로 정책금리가 제로에 근접해 금리정책의 약발이 더 먹혀들지 않는 한계상황에서 동원된다. 일본중앙은행(BOJ)은 지난 1999년 4월부터 제로금리를 유지했음에도 디플레이션 치유가 어렵자 2001년 3월부터 2006년 3월까지 5년간 은행 보유 장기 국채를 매입, 장기금리를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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