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건축계에 김수근과 김중업이 있었다면 해방후 북한의 대표 건축가는 누구일까.북한에는 해방후 일제 건축잔재 청산부터 평양복구계획을 세워 현재의 평양을 있게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대표적 건축가가 김정희가 있었다. 그는 일제이후 30여년 동안 김일성의 지극한 총애 속에 각종 도시계획과 북한 건축정책 등을 주도했다.
건축연구 전문가인 이왕기(목원대 건축도시공학과)교수가 최근 건축전문지「이상건축(2월호)」에 이같은 자료를 공개해 관심을 끌고 있다.
김정희는 일제 때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해방후 김일성과 인연을 맺고 30여년간 북한 최고의 건축가로 활동해왔다.
북한의 도시는 해방후 대대적인 식민잔재 청산에 들어간다. 평양을 중심으로일본인 거주지와 각종 주택 및 건축물은 물론 친일파 주택까지 완전히 몰수해 개·보수하거나 철거했다.
김일성은 해방후 평양을 사회주의가 잘 표현된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 위해 건축가가 필요했고 김정희가 발탁된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51년, 김정희는 김일성의 집무실과 가까이서 평양시 복구계획을 주도했다. 당시 김정희 직책은「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산업국 건설부장」. 이후 75년 11월 사망 당시 2~3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북한 건축분야 최고자리를 유지해왔다.
46년에는 북한내 건축가 300여명을 모아 조선건축동맹 조직했다. 60년경에는 1만여명의 회원을 둔 북한의 대표적 건축단체로 키워, 줄곧 위원장직을 맡았다. 55년엔 헤이그에서 열린 제4차 국제건축가연맹(UIA) 총회에서 정식으로 회원국 가입하는등 국제화에도 힘을 쏟았다.(한국건축가협회는 1963년 가입)
김일성은 46부터 2년간 김정희를 러시아 유학까지 보내고 러시아 방문길에는 그를 직접 찾아 위로하곤 했다. 귀국후 김정희는 전후 평양복구계획을 맡았고, 여기서 그는 동평양지역을 적극 개발하는 신도시계획을 수립한다.
김정희는 65년초 휴양각 건축프로젝트 수행중에 주변사람들과 의견상충 문제로 김정일의 눈밖에 나게된다. 이로인해 72년 평안남도 도시설계사업소 안주분소장으로 좌천돼, 지하도시 프로젝트 수행중 75년 11월 사고로 숨졌다.
김일성이 김정희를 안주분소장으로 좌천은 시켰으나 그에 대한 신뢰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은 그를 애국열사릉에 안장시켰고, 그가 계획한 안주시의 도시계획안을 토대로 안주시를 개발토록 지시했다. 또한 86년에는 김정희를 주제로 한 영화「한 건축가에 관한 이야기」를 영화를 만들도록 했다. 이처럼 김일성은 건축가 김정희를 깊이 신뢰했다.
이밖에도 김일성은 조선혁명박물관에 김정희가 생전에 사용했던 설계도구·나침반·평양복구건설 총계획도·김정희 사진 등을 전시토록 했다.
이교수는『김일성과 김정희의 관계는 히틀러가「알베르트 스피에르(ALBERT SPEER)」란 건축가를 총애했던 것과 유사하다』고 밝혔다. 권력가가 자신의 권력 형상화를 위해 건축가와 긴밀해지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실례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교수는『비록 사상과 이념이 다르긴 하지만 김일성이 도시·건축문화발전을 위해 건축가의 전문성과 그 역할·소임 등을 존중했던 것은 우리 위정자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박영신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