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통화전쟁 `상처뿐인 승리'

홍콩 달러는 비록 살아 남았지만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만 했던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헤지 펀드 등 투기세력이 지난해 10월26일 홍콩 달러를 겨냥, 본격적인 공략에 나선지 1년째를 맞아 국제금융계에선 홍콩의 통화전쟁에 대해 이같은 판정을 내리고 있다. 아직 명확한 승패 여부를 판단하긴 이르지만 홍콩 금융당국(HKMA)이 일단 페그제(달러연동 환율제)를 사수하고 투기세력을 격퇴하는데 성공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금융시장도 뚜렷한 회복조짐을 나타내면서 청신호를 보내고 있다. 항셍(恒生)지수는 지난 8월엔 6,600포인트까지 떨어졌지만 이달 들어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집중되면서 다시 1만선에 근접하고 있다. 한때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던 시중금리도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각종 은행간 금리는 지난 8월 12%를 넘나들었지만 지금은 모두 한자리 숫자로 내려앉았다. 이같은 성공이 단지 외부요인에 따른 행운 탓인지 아니면 금융당국의 뛰어난 방어전술 덕택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우선 지난 8월 러시아사태가 터지면서 선진국 헤지 펀드와 투자은행들이 막대한 투자 손실을 기록한 것은 이들을 홍콩시장에서 퇴각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현지은행의 한 관계자는 『러시아의 불행은 곧바로 홍콩에 커다란 행운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미국이 두 차례에 걸쳐 기준 금리를 인하한 것도 홍콩의 외환시장 안정, 고금리 부담 해소에 긍정적인 역할을 미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금융당국이 홍콩달러 사수를 위해 신속하고 입체적인 방어작전을 전개했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금융당국은 지난 8월말 외환·증권시장에서 양동작전을 전개하던 투기꾼을 격퇴하기 위해 막대한 주식을 사들이는 한편 투기꾼 명단까지 공개하는 등 제도 보완책까지 동원, 정면으로 맞서 성과를 거두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당분간 투기세력이 홍콩시장에 다시 등장하긴 힘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의 롱 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의 파산 이후 은행들이 헤지 펀드에 대한 신용대출을 극히 꺼리면서 투기세력의 투자 여력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홍콩의 자유방임주의가 훼손되고 금융센터의 이미지가 흔들렸다는 큰 부담을 떠안게 됐다. 투기세력을 봉쇄하기 위해 동원됐던 고금리정책이 실물경제를 주저앉게 만들고 페그제 고수 여부를 둘러싸고 재계와 정계에 불화가 형성됐다는 점도 상처로 남아있다. 홍콩이 그런대로 방어에 성공했다지만 이번엔 중국 본토의 금융시장이 급속히 악화하고 있어 새로운 암초로 부각되고 있다. 홍콩과 깊숙한 관계를 맺고있는 중국계 투자신탁공사들이 잇따라 파산하거나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휘말릴 경우 이는 곧바로 홍콩에 타격을 미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홍콩달러가 다시 흔들리고 있으며 금융당국은 통화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시장 개입에 나선 상태다. 전문가들은 결국 정부의 깊숙한 개입이 시장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홍콩을 「혼합 경제체제」로 변질시켰다고 경고하고 있다. 리전트 퍼시픽 그룹의 분석가인 시몬 프리차드는 『홍콩에서는 이미 게임의 규칙은 달라졌다. 향후 2년 이내에 새로운 통화시스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정상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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