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8년 12월 6일, 에든버러. 팸플릿 수준의 책자 하나가 나왔다. 브래태니커 백과사전의 출발점이다. 사전을 만든 사람은 윌리엄 스마일. 당시 28세였던 그는 출판업자이자 인쇄업자의 의뢰를 받아 언어는 물론 사회 전반의 현상을 모았다. 스마일이 사전 편찬으로 받았던 돈은 200파운드. 비슷한 시대의 인물이며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가 글래스고대 정교수 자리를 집어치우고 귀족의 개인교사로 들어가며 받았던 돈이 연 300파운드였으니까 적지않은 금액이었다. 스마일이 펴낸 팸플릿은 처음부터 인기를 끌었다. 격주간으로 발행된 팸플릿 가격은 6펜스. 어지간한 지식인이면 부담이 없었다. 팸플릿 100회가 모여 3권짜리 ‘브리태니커 사전’으로 엮어졌을 때 영국인 독자들은 열광했다. 프랑스와 견줄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출판계를 휩쓸던 최고의 사전은 ‘백과전서’. 볼테르와 경제학자 케네가 집필하고 달랑베르가 편찬한 지식 결합물인 ‘백과전서’에 버금갈 지식 합체물이 나왔다는 사실에 감격한 영국인들은 책을 끼고 돌았다. 지식도 그만큼 깊어지고 널리 퍼졌다. 18세기를 지배한 대영제국 힘의 근원은 브리태니카 사전이라는 시각도 있다. 브리태니커 사전은 이후 소유권이 미국에 넘어가며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영국의 과거 영광과 미국의 지도력이 맞물린 결과다. 요즘 브리태니커의 판권은 스위스의 영화배우이자 사업자에게 넘어갔지만 그 권위는 여전하다. 문제는 브리태니커의 장래. 불투명하다. 사전의 권위를 믿고 안주한 결과다. 요즘 인터넷에서 조회수를 보면 브래티니커는 하향 추세다. 세월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리태니커 사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창의력과 늦지만 꾸준한 개혁, 그리고 적응.